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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매트릭스 정치'

안유회 / 논설위원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토머스 앤더슨은 1999년에 살고 있다. 낮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밤엔 아이디 네오를 사용하는 해커로 활동하는 그는 세상을 의심한다. 어느날 모피어스라는 인물이 그를 찾아와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내민다.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고 파란 약을 먹으면 다시 지금까지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빨간 약을 먹은 앤더슨의 눈 앞에 현실이 드러난다. 그는 2199년에 살고 있다. 인간은 인공지능(AI)과의 싸움에서 패했다. AI는 인간을 고치에 넣고 생체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대신 인간의 뇌 속에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세상을 주입해 현실 세계에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2014년 한국 국회 예산결산특위의 2015년 예산안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청와대의 조직은 방대하다.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실 3실로 나뉜 직제의 정원은 993명이었고 실제 근무 인원은 960명이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청와대를 이런 방대한 조직을 바탕으로 생각한다.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10명에 이르는 수석비서관, 국무총리와 장관 등의 보좌를 받는, 고도로 전문화되고 조직화된 어떤 시스템이라고. 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중요한 모든 정보가 모이고 중대한 국가적 결정이 나온다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고도의 시스템이라고 믿은 것은 매트릭스였다. 행정부와 1000명에 육박하는 청와대 조직은 그저 실상을 가리는 입력된 프로그램으로 전락했다. 예컨대 개성공단 폐쇄 결정만 해도 통일부와 청와대라는 국가의 시스템을 거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비판도 하고 찬성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매트릭스로 이용했을 뿐이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합의된 시스템을 갖고 있다. 그 시스템의 최고 수호자는 박근혜 대통령이어야 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시스템을 해체했다. 그 위에 세운 사설 그 시스템은 전근대 이전에도 찾기 어려운 원시적인 것이었다. 샤머니즘도 타락한 샤머니즘 수준이다.

매트릭스가 걷히자 나타난 현실은 처참한데 이에 대응하는 박 대통령의 대응방식은 여전히 '매트릭스 정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청와대 측근 경질, 총리 교체, 비서실장 교체 카드는 익숙한 정치적 제스처다. 하야를 요구하는 두번째 촛불집회의 규모가 커지고 야당에서 퇴진 주장이, 여당에서 탈당 주장이 나오자 영수회담을 제의했다. 정상적인 시스템 안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이다. 일종의 매트릭스 복원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박승주 국민안전처 장관 내정자의 경력은 이런 복원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박 내정자는 올해 5월 무속 행사 참가, 전생 체험 저서 논란에 이어 박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까지 불거졌다.

지금 세상은 급격히 다음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 균형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미국으로 기울면서 중국과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한의 5차 핵 실험 이후 미국에서는 북미대화 재개 주장과 함께 핵 보유국 인정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까지 나왔다. 미국은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더라도 적지 않은 내홍을 겪을 것으로 보이고 일본은 우경화 경향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세계적인 저성장 시대 진입과 고용 산업의 퇴조를 경고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지만 이를 상쇄할 내수의 확대는 꿈 꾸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한때 일각에서 한국 경제의 구원투수로 기대했던 남북 경협은 그라운드 제로가 됐다. 이런 와중에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조선·전자·자동차 산업은 이미 침체했거나 침체를 우려하는 어려운 상황이다. 조선산업에 이어 해운업까지 위기에 내몰리며 일자리 창조는 현상 유지도 힘들게 됐다.

이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을 사설 시스템이나 매트릭스로 감당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미 '빨간 약'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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