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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민병수 변호사…한인사회와 울고 웃으며 70년 세월을 건넜다

초대 총영사 부친 따라 1947년 14세 때 LA 와
초등교사 15년간 재직하다 가주 3번째 한인변호사 돼

무료법률상담 처음 여는 등 한인사회 일 팔 걷고 나서
5년 전 안구암 수술불구 변론·봉사활동·강연 활발


그러니까 이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미드 윌셔가에 고급 백화점이 즐비하고 영화 '드리이빙 미스 데이지' 한 장면처럼 제복 입은 운전사가 모는 리무진을 탄 귀부인들이 그 길을 누비던 20세기 중반의 이야기다. 가늠조차 안 되는 이 까마득한 옛날 옛적 LA한인타운 풍경을 들려준 이는 바로 민병수(83) 변호사다. 1947년 12월 까까머리 중학생 소년이던 그는 초대 LA총영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꼬박 2주 걸려 태평양 건너 미국에 왔다. 가늠할 수 없는 건 단지 그 시절 풍경만은 아니다. 이제 막 해방된 조국을 떠나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린 소년이 겪었을 힘겨운 이민살이는 어떠했을 것이며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존재하던 암울했던 그 시절을 통과해온 '꼬레 청년'의 지난한 싸움은 또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5년 전 안구암 수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정으로, 무료법률상담으로 동분서주하며 청년처럼 살고 있는 민 변호사를 LA한인타운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인종차별 딛고 교사가 되다



조선시대 명문가였던 그의 가족사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조국의 아픈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댔던 백부는 혹시라도 그 사실이 발각돼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 싶어 아우였던 민 변호사의 부친을 일찌감치 미국 유학 보냈다고 한다. UC버클리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부친은 10년 뒤 귀국해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그 후 1947년 LA총영사로 발령 받은 부친은 아내와 3남2녀를 이끌고 미국에 왔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천리 타향 길 앞두고 인천 부둣가에서 흙 한줌 주머니에 넣고 LA에 온 그의 고교시절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전교에서 동양인이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ESL 클래스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영어로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미국 오기 전 경기중학교에 재학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고 있던 영민한 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을 터. 그렇게 힘겨운 고교시절을 보내고 졸업한 후 그는 포모나 인근 라번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유색인종 교사는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라 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 후인 1960년 몇 번의 면접 끝 교생실습을 나갔던 웨스트코비나 교육구 소재 한 초등학교에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당시 교육구내 수 백여 명 교사들 중 동양인은 그를 포함 고작 3명뿐이었다고 한다.

#가주 세 번째 한인 변호사가 되다

교직생활 8년 차쯤 되던 1970년 그는 YMCA 활동을 하며 만난 아내 캐롤 민(73)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백인인 아내와 데이트를 하고 있노라면 백인 노인들이 노골적으로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백인과 유색인종 간 결혼금지법이 있었으나 다행히 결혼 무렵 그 법은 폐지됐다. 결혼 이듬해 첫아들이 태어났고 그는 변호사가 될 결심을 한다. 당시 법대와 의대에선 유색인종을 받아 주지도 않던 시절이라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법관 임관이나 변호사 취직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 미국 배심원제도에 대한 책을 읽고 막연하게 미 법정에서 변론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꿨었죠. 그래서 더 늦기 전 꿈을 이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글렌데일 소재 야간 법대에서 주경야독 끝 1975년 당당히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가주에서 세 번째 한인 변호사가 배출되는 순간이었다. 합격 후 바로 그는 윌셔가에 변호사 사무실을 낸다. 변호사 개업과 함께 그가 세운 철칙은 한인들 간 소송은 대리하지 않는다는 것과 돈을 벌기보다는 가능한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개업 후 첫 1~2년은 고전했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이민문호 개방과 함께 한국에서 이민행렬이 이어지면서 사무실은 북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그는 LA한인사회 유일한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입지를 굳히면서 하루에 다섯 차례씩 법정을 오갈만큼 바빠졌다.

#한인사회와 함께 한 삶

그의 인생사는 한인사회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2세들로 구성된 한인회(AKCO)를 시작으로 KYCC 이사, KAC 이사장, 한미변호사협회 회장, 남가주 미주한인재단 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왔지만 한인사회 일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팔 걷어붙이고 나서게 된 계기는 바로 1992년 발생한 4·29 LA폭동이다. 폭동 후 한인사회 권익보호를 절감하게 된 그는 1993년 한인법률권익재단(KALAF)을 조직하고 LA시를 상대로 리커 업주들에게 불합리한 조건부영업제한(CUP)에 대한 소송을 진행했다. 2년이 넘게 걸린 지루한 싸움이었지만 그는 업주들을 독려해 결국 승소를 이끌어냈다. 또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실상을 주류사회에 알리고 소녀상 건립에도 발 벗고 나섰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해요. 중학생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위안부로 끌려가는 여학생을 조례시간에 불러내 칭찬하던 그 장면이…결국 그 여학생은 돌아오지 못했지요."

뒷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국의 아픈 역사는 여든 노신사에겐 그저 온 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통한의 개인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미주한인사회를 위한 그의 공을 인정받아 그는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2009년엔 '대한민국 법률대상' 해외동포부문 법률대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고희를 넘겨서도 활발한 활동을 할 만큼 건강한 그였는데 2011년 6월 돌연 왼쪽 눈에 안구암 말기 선고를 받게 된다. 수술시간만 8시간에 사망확률도 30%에 이르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큰 수술이었다.

"그래도 감사할 따름이죠. 오른쪽 눈은 볼 수 있으니까요. 분명 제 인생에 어떤 뜻이 있어 이런 암을 만났지 싶어요.(웃음)"

수술 후에도 여전히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법정에 나가고 무료법률상담 현장과 강연장을 누비며 청년처럼 살고 있다. 어느새 그의 춘추 여든을 넘어섰다. 격랑의 한미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해온 그의 삶은 이제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역사책이 됐다. 어수선한 상실의 시대, 포기를 모르고 희망을 향해 쉼 없이 전진했던 그의 삶이야말로 길을 잃고 낙심한 우리들에게 명쾌한 나침반이 돼줄지도 모르겠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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