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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향기 남기고 떠난 고 이원상 목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겸손과 기도의 목회 인생
생애 마지막 설교서도 전도·선교 강조

5일 소천한 고 이원상 목사는 1937년 중국 만주 산성진에서 부친 이성봉 장로, 모친 윤봉선 성도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1945년 부친 이성봉 장로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북한 만포진으로 이주했지만, 북한에서도 신앙생활이 어려워 2년 뒤인 1947년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청량리로 내려왔다. 이 목사는 이곳에서 전농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다.

1949년 가족들을 따라 경상북도 경산으로 옮겨간 이 목사는 경산중학교와 대구상고, 대구 계명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505병기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1965년 경북대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목사는 1966년 약사인 김영자 사모와 결혼했다. 훗날 이 목사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이 김영자 사모라고 고백한다. 이 목사는 지난 2003년 본지와 인터뷰에서 “아내는 목사인 나보다 교인 가정 하나 하나를 더 깊게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왔다”며 “25년간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약사로 근무하면서도 교회일에 소홀함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잠이 부족할 텐데도 낮에 내가 심방갈 때는 항상 동행하는 등 교회 일에 빠짐없이 동참해줬다. 두 자녀도 아내가 책임지고 양육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68년 미국으로 와 댈러스 신학교에 입학,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이 목사는 “그 때는 미국에 오래 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며 “당시 댈러스에 한인들이 300명 정도 있었는데 점점 이민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미국에도 한인목회자와 한인교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1972년 댈러스 신학교를 졸업한 이 목사는 1973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1977년 박사 논문을 준비하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의 청빙을 받게된다. 이 목사는 1977년 12월 전도사 신분으로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교역자로 부임했다. 당시 교인은 14가정, 30명이었다.

목회 초기에 어려움이 많아 신학을 공부했던 댈러스로 옮겨갈 생각을 하고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던 이 목사는 “교인들의 만류로 교회에 계속 남게됐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무사히 목회를 마치게 됐다. 나의 목회인생을 정리한 신앙고백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다”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목회를 하면서 ‘기도생활’을 가장 중요한 목회원칙으로 삼았다. 이 목사는 “다른 목회자들처럼 훌륭한 담임목사 밑에서 목회훈련을 받지 못하고 곧바로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나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기도생활을 가장 중요한 목회원칙으로 삼았다. 1977년 부임하면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일기예보상 다음날 새벽 날씨가 나빠 교회에 나오기 어려울 것 같으면 아예 그 전날 교회에서 밤을 지새우더라도 새벽기도회를 중단하지 않았다. 82년부터는 매주 수요일에 금식했다. 기도사역과 더불어 교인들을 돌보는 심방사역에도 힘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2003년 9월, 25년 10개월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했다. 은퇴를 앞두고 이 목사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 훈련을 강도 있게 지속하지 못한 것과 지역사회 기여가 미흡했다고 아쉬워했다. 이 목사는 “장로, 권사, 안수집사, 구역장, 선교회장들은 교회의 큰 자산인데 다른 업무에 시간을 빼앗기다보니 이들을 훈련시키는 데 다소 소홀했던 것 같다”며 “또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2009년 9월 영국 웨일즈 복음 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논문제목은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이끈 교부 요한 크리스토스무스와 와싱톤중앙장로교회를 이끈 이원상 목사의 목회 리더십 원칙에 관한 수세기를 초월한 비평적 탐구와 대화’다.

이원상 목사는 2013년 프라션 선교회를 창립, 생의 마지막 열정을 기도운동에 쏟아부었다. 식도암으로 투병하던 지난해 12월 항암치료 중에도 프라션 국제선교기도센터 행사에 참석해 기도운동을 강조했다. 기도센터 건립 관련 행사에서 이 목사는 “초·중·고등학생들이 어려서부터 기도스쿨을 통해 기도훈련을 받았으면 좋겠다”며 “학생과 은퇴 선교사, 안식년을 맞은 선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센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에는 ‘ARISE 2016’ 행사 준비를 하며 회개하고 기도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세월이 흐를수록 가정과 교회와 나라가 나아지기보다 점점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구약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여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계역사를 주관하고 개인과 가정, 교회를 회복시키는 하나님 여호와께 말씀 위에 서서 찬송과 기도를 드리자”고 말했다.

지난 6월 워싱턴DC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서도 회개와 기도를 강조했다. 당시 바람이 많이 부는 현장에서 이 목사는 큰 목소리로 청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7가지 질병을 지적했다. 이 목사는 “첫째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물질 우상을 섬기고 있고, 둘째 거룩한 삶보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 있으며, 셋째 경건한 가정이 무너지고 있고, 네 번째는 교회가 빛을 잃었고, 다섯 번째는 정직한 마음이 무너지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여섯 번째는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일곱 번째는 성경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이 목사는 “지금 미국은 해마다 4000개 교회가 문을 닫고, 4만여 명이 자살하며 동성결혼을 대변하는 사람이 높임을 받고 있다”며 “한국과 미국이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바뀌고,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며 정직한 사회로 회복되도록 기도하자”고 설교했다.

지난 8월 13일 올네이션스교회에서 열린 ARISE 2016 기도성회에서 고 이원상 목사는 워싱턴한인사회에 마지막 당부를 했다. 이 목사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최상의 소원과 목표는 전도와 선교”라며 “우리가 사람 낚는 어부 일을 안 하고 주님 앞에 가면 칭찬받을 일이 없다”고 말했다.

<고 이원상 목사 약력>
◇1937년: 중국 만주 산성진에서 부친 이성봉장로, 모친 윤봉선 성도 사이에서 출생
◇1945년: 가족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북한 만포진으로 이주
◇1947년: 가족들이 북한에서도 신앙생활이 어려워지자 서울로 피난
◇1949년: 경북 경산으로 이주, 경산중·대구상고·계명대 졸업
◇1959년~1961년: 505 병기단에서 군복부
◇1966년: 약사인 김영자 사모와 결혼
◇1968년: 미국 댈러스 신학교 입학
◇1972년: 댈러스 신학교 졸업
◇1977년: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전도사 부임
◇2003년: 와싱톤 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직 은퇴
◇2009년: 영국 웨일즈 복음 신학교 철학박사 학위 취득
◇2013년: 프라션 선교회 창립



심재훈 기자 shim.jaehoo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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