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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한 번도 비행학교를 얘기하지 않아"

망명가들: 비행학교 설립한 백미대왕 김종림(하)
대한민국 최초 파일럿은
안창남이 아닌 이응호다

▶어린 시절 자라나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때는 어디를 가든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을 가하던 시대였다. 나와 친구들 다섯 명이 할로윈데이 밤에 길을 걷고 있었는데 두 명의 사복 백인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더니 차에 타라고 했다. 우리가 경찰 배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그들은 우리에게 총을 겨누면서 차에 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감옥에 30일 동안 수감되었고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우리의 상황을 파악한 판사가 기각시켜 풀러날 수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미주 한인들은 일본계를 싫어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나는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친구들은 모두 일본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때 나는 2년 동안 유도를 배웠다. 아버지는 처음에 내가 유도를 하는 것을 무척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유도장에 오셔서 내가 연습하는 것을 보시곤 했다. 진주만 공격 이후 나의 일본계 친구들은 모두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아주 아픈 기억이다.

아버지는 정말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일본의 만행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일본을 증오했다.

▶아버지의 그러한 감정이 어떻게 드러났나?



아버지는 내가 일본계 친구들과 사귀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내 주변엔 한국인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계 친구들과 사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출생한 일본계 미국인이지 아버지가 증오하는 일본인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한국아이들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은 어머니를 앨리스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어릴 때 미국에 오신 분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무 살이 넘었다. 물론 중매결혼이었고 당시 아버지는 매우 부자였다.

우리 부모 세대는 이승만계의 동지회와 안창호계의 국민회로 분열되어 심하게 다퉜다. 그러나 우리는 상관하지 않고 서로 잘 어울렸다. 우리만의 클럽 을 따로 만들어 파티도 같이 참석하고 즐겁게 어울렸는데 시간이 흘러 우리가 성장하고 직업을 갖게 되자 자연스럽게 헤어졌고 이후엔 서로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유교주의자셨고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한 분으로 근엄하고 고집이 엄청 세고 엄격한 한국인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딸들에게는 특히 더 엄격했는데 아들들에게 는 그 정도로 엄하게 대하지는 않으셨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아들이란 절대로 잘못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에게 가끔 매를 맞았지만 아버지는 절대 아들들을 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설립한 비행학교에 대해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나?

아니 단 한번도 비행학교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다. 말했듯이 집에서 아버지는 말없이 근엄하게 행동했다. 사실 비행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동지회에서 알게 된 노총각 아저씨와 어머니에게서 나중에서야 들었다. 어머니와 살 때 어머니가 나에게 이야기해주셨다.

그들은 아버지가 독선적이었지만 이승만의 충실한 지지자였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로스앤젤레스에 와서 동지회 회원들과 만났던 일을 전해 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홍수 피해로 사업을 완전히 접고 가난한 삶을 꾸렸던 시기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아버지를 냉대하면서 모른체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행동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작은 일보다는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 큰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망명했던 시절 그는 돈 많은 한인들에 의지해 살았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아버지가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많은 동지회 사람들로부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들었고 그를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아버지에게 한 행동이 몹시 비열하다고 느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다. 이승만 대통령은 돈만 좇는 저열한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수차례 말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까지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했다.

▶한국 정부 관리들로부터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가?

한국 정부 관리 어느 누구도 어머니와 나에게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물은 적이 없다. 당신이 처음으로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아버지는 1920년 대홍수로 쌀농사를 망친 후 무명으로 살다 돌아가셨다.

다음은 안랠프가 기억하는 김종림이다.

나는 김종림의 아들 돈보다 2주 먼저 태어났는데 우리는 여덟 살때부터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우리의 또 다른 친구인 하워드와 나는 프레즈노로 돈을 찾아간 적이 있다. 돈은 그곳에서 아버지의 소작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돈은 그곳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친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전쟁이 터진 후 우리 셋 모두는 미 해군에 입대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돈은 지긋지긋한 프레즈노를 떠나기 위한 방편으로 미 해군에 입대하기로 한 것이었다. 돈의 아버지 김종림은 별로 좋지 않은 땅을 빌려서 채소를 심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 땅은 원래 과일 농장이었다. 주변에 간이 건물이 조금 있을 뿐이고 물도 나오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늙으신 김종림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셨고 우리는 그곳에서 돈과 함께 두 달 정도 일하기로 했다. 주로 오이 호박 토마토 그리고 상추와 같은 채소를 심고 수확하는 작업이었다. 돈은 아버지처럼 매우 열심히 일했는데 우리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하루 종일 10시간이 넘도록 농사를 도왔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친구 돈이 외로울까 봐 함께 여름을 보내기 위해 간 것이었다. 돈은 프레즈노를 떠나 집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가고 싶어했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고 우리는 모두 미 해군에 입대하길 원했다. 그리고 입 대 전 몇 달을 로스앤젤레스에서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돈은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아버지에게 말하길 두려워했다. 드디어 돈은 아버지 김종림에게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김종림은 어두운 표정으로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돈이 집에 들렀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니 김종림은 로스앤젤레스에 가려는 이유를 물었다. 그제서야 돈은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저는 농장 일이 싫어요." 그러자 돈의 아버지는 덤덤히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렴." 우리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는 돈의 아버지 김종림을 무서워했다. 매서운 위상이 있고 몹시 근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존경했다. 아마 김종림이 권위적이며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마침내 우리는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다이뉴바에서 로스앤젤레스행 버스를 타야 했는데 다이뉴바가 우리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타운이었다. 돈이 나에게 부탁했다. "우리 아버지가 너를 제일 좋아하니까 우리를 다이뉴바 까지 태워달라고 여쭤볼래?" 나는 "아니 나는 말못해"라고 대답했고 하워드 또한 말을 꺼낼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모두 김종림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려 50km를 걸어서 다이뉴바까지 가야 했는데 가방을 들쳐 메고 힘들게 걸었던 기억이 난다. 평생 못 잊을 여름이었다.

그해 10월 돈이 가장 먼저 미 해군에 입대했고 나는 11월 그리고 하워드 는 나중에 미 해군에 입대해 우리 셋 모두 미 해군병이 되었다.

▶미주 한인 역사에서 김종림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나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가 바로 김종림이다. 김호와 김형순의 김형제 상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잘나갈 때 북가주에서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집에 살았고 가장 큰 규모의 쌀 농장을 운영했다. 게다가 김종림은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했고 모든 재정을 도맡아 운영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백만달러 이상의 거금을 기부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도 비행학교를 지원했는데 김종림은 동지회 회원으로 이승만 박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물론 나의 아버지 안창호와 김종림은 흥사단의 창립 회원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1920년 10월에 100년 만의 대홍수로 김종림 농장이 침수되어 망했는데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무일푼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림은 재기를 꿈꾸며 항상 열심히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커피 사업에 손을 대 사업을 다시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임페리얼밸리에서 다른 한인들과 함께 쌀농사를 다시 하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89세까지 무명의 소작농으로 힘들게 일만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돈과 나는 김종림이 백미대왕으로 등극했다가 1920년에 쌀농사를 망친 후 태어났다. 그래서 돈은 자신의 아버지가 큰 돈을 벌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기부금을 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김종림이 아들에게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일절 언급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돈의 어머니를 잘 알았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무척 고생을 많이 했다. 세탁 주방 식당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가정을 보살피며 무척 고된 삶을 살았다. 나는 김종림을 정말 권위적인 사람으로 봤고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평생 위엄을 지키고 산 분으로 기억한다. 나는 친구 돈도 존경한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평생 열심히 일한 자랑스러운 친구다. 돈은 일할 때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고 어떻게 체계적으로 진행시켜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김종림은 동지회 회장이었던 이승만에게 기부를 많이 했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망명 시절 돈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를 요청하며 미 전역을 다녔다. 물론 김종림에게도 기부를 요청했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 김종림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상당한 액수를 기부했다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 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서 동지회 회원들과 모임을 가졌을 때 김종림을 아는 체도 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모른다. 그런데 정말 슬픈 이야기이지 않은가.

▶대한민국 정부가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한 김종림의 공로를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게 사실이라면 충격이다. 돈 김이 나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김종림에게 훈장을 추서해야 한다. 별로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다 상을 받았는데 김종림이 훈장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장 보훈처에 신청을 해야 된다. 나도 열심히 돕겠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종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옮긴이

대한민국 최초 파일럿은 1921년 일본에서 조종사 자격증을 획득한 안창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18년 이응호(이조지)는 미군에 입대해 156회 출격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발굴됐다. 이응호가 대한민국 최초의 파일럿으로 기록 되어야 할 것이다.

<18화 끝>

이경원 저ㆍ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장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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