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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헤밍웨이의 자살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중년기에 접어들어 발표한 소설 '노인과 바다'는 1953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다음해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작가는 수상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1954년 1월 그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사냥 여행을 하던 중 두 번이나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해 심하게 전신에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동안 쿠바에 살면서 카스트로의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이 힘들어지자 바다가 내려 보이는 아바나 집을 처분하고 1959년부터 아이다호주 케첨이란 작은 마을에 집을 마련해 근거지로 삼았다.

아바나의 집은 아직도 쿠바 정부에서 헤밍웨이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당시 그의 건강은 일생 마신 술로 인해 고혈압 심장 질환 간 질환 발목의 부종 혈액 내 요소의 증가 당뇨병 반복성 근육 경련 게다가 불면증과 성 기능장애까지 따랐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과 1961년 사이 우울증 외에도 망상이 발생해 무척 시달렸다. 만일 쿠바가 공산화된다면 FBI 요원들이 자기를 감시하고 은행 계좌를 뒤지며 결국 조국을 배반한 범인으로 엮어 자신을 체포하리라는 망상으로 공포에 질렸다. (그것은 단순한 망상만은 아니었다. 그가 한동안 카스트로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FBI가 그를 감시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졌다.)

1960년 가족들은 그를 미국에서 가장 이름 있는 미네소타주 메이요 클리닉에 입원시켰고 그는 '전기충격 치료'까지 받았다. 그러나 퇴원한 직후 어느 날 아침 부인은 헤밍웨이가 장총을 쥐고 창 밖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내다보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즉시 그에게 안정제를 먹인 후 메이요 클리닉으로 다시 입원시켰다.

두 달 후 그는 우울증에서 회복되었다면서 퇴원을 요구했다. 6월 마지막 주 부인은 그를 메이요 클리닉에서 아이다호주까지 그 먼 길을 차에 태워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안심하기 위해 그녀는 총기를 지하실에 잠가두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열쇠를 비치한 곳을 알고 있었다. 부인이 잠든 사이 파자마 가운을 몸에 걸치고 어둠 속에서 식당 싱크대 위 선반에서 열쇠를 더듬어 잡았다. 그는 지하 저장실 문을 열고 쌍 열 장총 한 자루를 골라잡았다.

그가 비둘기 사냥 때 애용하던 총이었다. 그는 집 앞마루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는 전에 아버지가 했던 똑 같은 방법으로 총을 관자놀이에 겨냥한 다음 두 발을 함께 발사했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 그를 발견한 부인은 처음 그가 총기 소제를 하다가 일으킨 사고로 생각했다. 그러나 평소 명사수인 그의 주위에는 총을 소제하는 도구를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는 동물을 죽일 때엔 깨끗이 처리할 의무가 있다. 만일 상처만 낸다면 우리는 끝장을 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말은 1950년 그가 한 편지에 적은 구절이다. 물론 사냥에 대한 언급이었지만 이것은 그가 죽음에 대해 일관되게 견지해 오던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는 케첨 도시의 묘지에 묻혔다.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손녀 마고 헤밍웨이도 같은 묘지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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