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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윤스시계 윤태업 사장

외길인생 60년…시계수리愛 정년은 없다
중학생 때 수리 기술 익혀
타운서 40여년 가게 운영

이민 와 '오메가'서 근무
명품 수리 전문가로 유명
4·29 후 돈보다 행복 추구
판매 접고 수리만 해 와
정스 폐업 후 1년간 휴식
8월 확장이전…영업 재개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일면식은 없지만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어느 날 문득 보이지 않으면 못내 안부가 궁금한 이가. 분침과 초침이 교차하고 그 사이를 가득 메운 수십 수백의 부품 속 초정밀 세상을 누비는 사나이, 윤스시계 윤태업(77) 사장이 그러했다. 작년 여름 정스프라이스 센터가 폐업하면서 센터 한켠에서 20년 넘게 시계를 고치던 그도 사라졌다. 그랬던 그를 1년여가 지난 8월의 어느 날 LA한인타운 한 마켓 2층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전보다 커지고 깨끗해진 시계방 안에서 그는 예전보다 더 활기차고 건강해 보였다.

#대한민국 1급 시계수리 기능사 1호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경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부산에서 시계방을 운영하는 손위 형네서 살게 되면서 시계 수리와 인연을 맺었다. 낮에는 시계방에서 어깨 너머로 시계 수리를 배우고 밤에는 야간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독학으로 시계 수리를 익힌 소년은 얼마되지 않아 형을 제치고 그를 찾는 단골들이 생길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고교졸업 후엔 아예 형의 가게를 도맡아 운영했고 가게는 부산일대 입소문을 타면서 단골들도 제법 늘었다. 그렇게 10년쯤 가게를 운영하다 군 입대를 했다.



제대 후인 1970년 그는 부산에 '제네바 시계'를 오픈했고 결혼도 했다. 이듬해엔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으로 실시한 시계수리 기능사 자격시험에 응시, 1급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3년 뒤인 1974년 간호사였던 아내 윤경자(72)씨와 함께 LA로 왔다. 당시 세 살, 다섯 살이던 두 딸은 자리 잡으면 데려가기로 하고 본가에 잠시 맡겨놓았다.

"2년 뒤 애들을 데려왔는데 그 2년간 아내가 마음고생이 참 심했죠. 매일 밤 애들 사진을 붙잡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으니까요."

그랬던 그 두 딸들은 이제 성공한 사회인이 됐다. 큰 딸 엘림(46)씨는 알래스카 주정부 환경보호국 프로젝트 매니저를 거쳐 현재는 성공한 사업가로, 둘째딸 살리나(44)씨는 패서디나 아트센터 교수를 거쳐 유명 동화작가로 활약하며 부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명품 수리전문으로 유명

LA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그는 LA다운타운에 위치한 유명 시계 브랜드 '라도' LA지사 서비스센터에 취직했다. 시계 수리기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의 꼼꼼하고 탁월한 실력은 그 바닥에 금방 소문이 나 2년 뒤 명품브랜드 '오메가' LA지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이후 오메가에서 4년간 수석기사로 근무했다. 오메가 근무 때 받은 주급은 300달러. 당시 아파트 렌트비가 100달러 안팎이었다고 하니 적잖은 액수다. 이처럼 미국 생활이 안정세에 접어들고 돈도 제법 모이자 1980년 그는 주저 없이 사직서를 내고 LA한인타운 8가와 카탈리나 코너에 700스퀘어피트 남짓한 가게를 얻어 '윤스 시계' 간판을 걸었다.

"80년대 초반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장사가 정말 잘됐어요. 롤렉스와 오메가 등 명품 시계를 팔았는데 귀국선물과 예식용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죠."

시계 판매뿐 아니라 그의 수리 실력도 입소문을 타면서 한인 명품시계 컬렉터들도 줄지어 그를 찾았다. 명품 시계일수록, 정교한 제품일수록 '정기검진'은 필수이기 때문. 당시 그를 찾은 수많은 고객들 중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가게 오픈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찾아 온 50대 후반의 중년 신사가 그러했다. 그 신사가 내민 것은 명품 브랜드 '파텍 필립'으로 당시 3만달러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었다.

"그 신사분 말이 미국 큰 수리전문점에 의뢰했더니 못 고친다며 스위스 본사로 보내라 해서 고심하다가 소문을 듣고 수리를 의뢰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저 역시 처음 만지는 시계였는데 날 잡아 오후부터 문 닫고 앉아 새벽까지 수리해 결국 고쳤던 게 기억에 남아요."

어디 지난 40년간 시계방에서 맞닥뜨린 에피소드가 이뿐이겠는가. 결혼 예물로 받은 명품 시계 수리를 의뢰받았다 시계를 열어 보니 가짜인 걸 안 뒤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했던 일부터 명품 시계 배터리 교체 값이 아깝다며 비전문가에게 맡겨 결국엔 시계를 망가뜨려 다시 찾아오는 이들까지…사연도 가지각색이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

이처럼 잘나가던 그의 비즈니스에도 고비가 찾아왔다. 바로 1992년 발생한 4.29 LA폭동이다. 당시 많은 한인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폭동으로 인해 손실을 입었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폭동 이후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때까지 나나 아내나 정말 쓰지 않고 모으기만 했는데 폭동 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그때 결심한 게 바로 적어도 1년에 두 번씩은 해외여행을 가는 거였고 건강을 위해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그해 여름 가게를 정리하고 정스프라이스센터 내 작은 점포를 얻어 시계 수리만을 하기 시작했다. 좀 덜 벌더라도 고가의 물건 도둑 맞을까 전전긍긍하기보다는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그의 작심 대로 1년에 두 차례씩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게 문 걸어 잠그고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시작해 지금껏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 30여 개국을 다녀왔다. 또 일주일에 서너 번은 그리피스파크에서 골프를 치고 출근할 정도로 골프도 열심이다. 이쯤 되니 그의 수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년에 두 차례씩이나 해외여행을 다니려면 비즈니스 수입이 웬만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맞아요. 다들 궁금해 해요.(웃음) 그런데 이게 참 재밌는 게 5~10달러짜리 배터리 교환을 하러 오는 고객들은 시계 수리해서 풀칠이나 하겠냐며 딱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100~300달러의 비싼 수리비를 지불해야 하는 명품시계를 맡기는 이들은 기술 하나로 앉은 자리에서 뚝딱 돈 버는 제가 부럽다고들 하죠. 결론적으로 수입은 여행 다닐 만큼은 벌어요. (웃음)"

1년 만에 그를 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는 이는 비단 기자만은 아니었나보다. 인터뷰 내내 그 반가운 마음들이 불쑥불쑥 가게 문을 밀고 들어와 짧은 인사를 건넸다. 고희를 넘긴 이 노(老) 시계수리공의 지난 40년 역사가 사람들의 인사를 타고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참 멋진 역사다. 참 멋진 인생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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