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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한미연합회 방준영 사무국장 "사회적 약자 돕고 공익을 위한 일에 가슴 뜁니다"

한국과 미국 오가며
학창시절 보낸 1.5세
유명 인권단체서 근무
저소득층 교육위해 노력

UCLA 부소장직 박차고
민족학교 거쳐 KAC 와
"어머니 돕는 마음으로
한인사회에 봉사하고파"


이 남자, 사연 한번 파란만장하다.

이제 겨우 서른여섯 총각의 사연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겠지만 지금 이곳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우여곡절 참 많았다. 바로 지난달 한미연합회(KAC) 신임 사무국장으로 취임한 방준영(36)씨다.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왔다 다시 한국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는 것도 눈길을 끌 뿐더러 고교시절 정학 처분 후 방황 끝 정치와 신학을 공부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도 그 행간 속 사연을 궁금하게 한다. 거기다 잘나가는 직장 때려치우고 자청해 LA한인사회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사연은 또 무엇일까. 이 질문들에 그가 들려준 답은 명쾌했지만 그 울림은 꽤나 묵직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다



여섯 살 때인 1986년 버지니아로 이민 온 그는 동네의 유일한 동양인 가족이었고 학교에서도 몇 안 되는 동양인 학생이었다. 그래서 네 살 터울 형과 그는 학교와 동네에서 어이없는 인종차별을 당하기 일쑤였다.

"겨울에 앞마당에 눈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동네 아이들이 와서 다 부셔버릴 정도였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별이 견디기 힘들어 부모님을 설득해 4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국제학교에 입학해 비로소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간은 그에게도 찾아왔다. 12학년 때 친구들과 이웃학교 학생들 간 다툼에 연루되면서 정학처분을 받은 것이다. 그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자청해 혈혈단신 뉴욕으로 건너 왔다. 하고 싶은 것도, 뭘 해야 할지도 몰라 2년여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 무렵 그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될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를 건 이는 바로 그의 고교동창.

"예수전도단 선교훈련원에 들어 간 뒤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됐다는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어쩐 일인지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래서 그길로 선교훈련원 입학을 알아봐 당시 가장 빨리 입학 할 수 있는 뉴질랜드 훈련원로 갔습니다."

뉴질랜드 남부 작은 타운에 위치한 예수전도단에서 보낸 6개월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당시 정말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죠. 그 간절함 덕분이었는지 원래 크리스천도 아니었던 제가 그 곳에서 참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같아요."

#나눔의 행복, 봉사의 기쁨

그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험은 선교활동 차 간 남태평양의 작은 섬 바누아투에서 보낸 석 달이었다.

"전기도 하수구도 없는 그곳에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가진 건 없지만 너무나 순수하고 행복하게 사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그들을 도와주면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죠."

제자훈련원 졸업 후 그는 2002년 바이올라 대학교에 입학, 정치학을 전공했고 신학과 국제 관계학을 부전공 했다. 졸업 직전인 2006년엔 워싱턴D.C 한 정책연구소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주말엔 뉴욕 소재 작은 한인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일했다. 워싱턴D.C에서 뉴욕까지 차로 왕복 10시간 거리였지만 소명 받은 일을 한다는 즐거움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인턴십을 끝내고 2006년 말엔 아예 뉴욕으로 이사해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본격적으로 교회 일에 전념했다.

"당시 교회에 방황하는 한인 청소년들이 많았죠. 저 역시 그런 시간들을 거쳐 왔기에 아이들을 이해하고 도와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후 2009년부터는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인권옹호 단체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법률교육기금단체(NAACP LDF)에서 프로그램 매니저로 근무하며 소수인종 인권옹호 및 교육기회제공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어린 시절 인종차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소수인종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7년간 정말 즐겁게 일했어요."

#한인사회 봉사는 내 운명

NAACP LDF에 근무하면서 그가 개발한 소수인종·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은 미국법률저널(National Law Journal) 등 각종 저널에까지 소개될 만큼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 무렵 그는 이직을 고민하게 된다.

"당시 제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LA는 대학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동부의 추운 겨울이 싫어 LA에 와야겠다고 생각했죠.(웃음)"

그러던 차 UCLA재단 부소장직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해 3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 2015년 7월 LA로 왔다. 급여는 물론 근무환경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마음 한구석은 공허해져만 갔다.

"재단엔 훌륭한 유명인사들도 많아 그들과 일할 수 있었던 것만도 큰 행운이었죠. 그런데 지금껏 사회적 약자를 도왔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지난해 2월 민족학교 사무국장로 취임했다.

"NAACP LDF가 흑인 인권옹호로 유명하다보니 재직 당시 왜 한인이 한인사회를 일해서 일하지 않느냐는 소리를 종종 듣곤 했어요. UCLA에서 회의를 느낄 때 즈음 문득 그 소리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주저 없이 한인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게 된 거죠."

민족학교에서 일하며 그는 한인사회에 대해 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어느 날엔가 민족학교를 찾아온 분 연세가 제 어머니랑 똑같더라고요. 그 순간 어머니도 타국에서 살면 이런 어려움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제가 하는 일이 남이 아닌 제 어머니, 할머니를 돕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한인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정도 커져갔죠."

그러다 지난 가을 KAC 이사회에서 사무국장 직을 제안해 왔고 지난해 12월 KAC 사무국장에 선임됐다.

"한인사회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플랫폼을 만드는 게 최우선 과제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주류사회에 알리는데도 힘쓰고 싶습니다. 거기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다면 행복할 따름이죠."

물질만능이 더 이상 세속적이지 않은 21세기 한복판에서 조금은 남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가고 있는 그의 발걸음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 행복을 옆에서 곁눈질 하는 것만으로도 꽤 뿌듯했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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