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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캠프' 한국 민주주의 씨앗 뿌려진 곳

[LA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1/03 11:29

작년 12월 6일 ‘문화 관심지’로 지정
역사적 가치 재조사 통한 성과


 리버사이드에 건립한 최초의 한인촌 &#39;파차파 캠프&#39;가 사적지로 지정됐다. 1911년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김영옥 연구소 제공]<br>

리버사이드에 건립한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가 사적지로 지정됐다. 1911년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김영옥 연구소 제공]

작년 12월 6일 리버사이드 시의회가 '파차파 캠프'를 미국 최초의 한인촌으로 인정, 사적지(City Point of Cultural Interest) 지정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승인을 받는 데 일조했던 UC리버사이드의 장태한 교수는 “파차파 도산 안창호의 미주 생활과 활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곳"이라며 "리버사이드 시의회가 리버사이드 한인촌 (파차파 캠프)을 사적지로 지정하게 된 과정을 소개하고 싶다"며 글을 보내와 이를 소개한다.

장태한 교수

장태한 교수

◇파차파가 관심 받지 못했던 이유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미주 한인사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에서도 제외 되어왔다. 도산 안창호 전기 그리고 논문에 리버사이드는 거의 언급이 되고 있지 않거나 '하변'에 거주했다고는 간단한 소개가 있을 뿐이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미주 한인사, 독립운동사, 그리고 리버사이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미주 한인사를 다시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리버사이드 파차파캠프는 도산의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로 인정 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도산 안창호의 지도력과 초기 한인들의 성실과 노력으로 형성되었고, 이들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함께 이루어 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는 1904년 3월 23일 리버사이드에 도착했다. 도산은 미국 전역과 세계를 순방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도산 가족은 1913년 12월까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미주 최초의 한인촌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07년 2월부터 1911년 9월까지 한국에 체류하면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1911년 9월 미국에 다시 돌아온 후 도산은 가족들이 거주하는 리버사이드에 정착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1911년 11월 22일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되었다. 신한민보는 대한인국민회 창립이후 최초로 모든 지방회 회장들이 참석했고, 이때 밤샘 회의는 12월 4일까지 지속되어 독립운동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의 리버사이드 활동이 주목을 받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도산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며 1905년 친목회를 공립협회로 발전시켰지만 그 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 두었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을 때도 발기인들의 상당 수는 리버사이드 거주자들이었지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있었다. 또한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에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대의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후 도산과 그의 가족은 1913년 12월 LA 이주하면서 로스앤젤레스 회원 자격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도산의 가족은 리버사이드에 적지 않은 기간동안 거주했지만,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대의원 자격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리버사이드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곳

그러나 도산은 1905년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공립신보를 발간했으며, 1906년 신민회 발기 또한 리버사이드에서 했다. 1911년에 한국에서 돌아온 후 대한인국민회 총회도 리버사이드에서 열렸고, 흥사단 창립 (1913)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었다. 또한 1913년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제닝 브라얀이 "미주 한인은 일본의 식민국민이 아님"을 선포하였던 것을 계기로 미주 한인들의 법적 지위가 비공식적으로 인정 되었던 헤멧 벨리 사건의 주역들 역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거주 한인들 이었다.

필자는 2003년 이선주 목사가 발표한 "리버사이드에서의 도산 안창호의 활동" 논문을 읽고 리버사이드 한인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목사는 파차파 캠프, 안도산 공화국으로 불렸던 리버사이드의 한인촌을 미주 한인 사회 최초의 코리아타운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으로 리버사이드에 민족공동체가 형성 되었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즉 도산의 리더십으로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자체적으로 규율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했으며, 동시에 도산 공화국으로 불리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 가치를 위한 재조사

이선주 목사는 또한 도산이 왜 리버사이드로 이주 했으며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 아주 자세히 소개하면서 도산의 리버사이드 생활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도산 안창호에게 1) 안정된 가정생활의 터전을 제공해 주었으며 2) 직업소개소를 설립하여 한인들에게 취업을 알선하고 한인공동체 형성의 기반을 닦았으며 3)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한 친목회를 리버사이드에서 공립협회로 개편 및 발전 시켰고 4) 1907년 4월 한국에서 창립한 대한인신민회는 리버사이드에서 발기 했으며 5) 1911년 도산은 리버사이드로 다시 돌아와 대한인국민회를 해외임시정부로 강화 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6) 젊은 세대의 교육과 계몽을 위해 흥사단을 조직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목사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한할 근거나 구체적인 자료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신한민보, 리버사이드 지역 신문, 그리고 리버사이드 캘버리 장로교회 자료 등을 찾기 시작했고 자료들을 통해 의문들을 하나 둘씩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퍼즐을 푸는 것처럼 자료를 하나 하나 발굴하면서 그 당시 한인촌 형성 과정을 맞추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들을 마주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논

문이 완성되어갈수록 '아 이것이구나!' 하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름으로 리버사이드 시에 사적지 신청서를 제출했고 1년여간의 심사를 거친 후 2016년 6월 15일 리버사이드 시 문화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라는 결과를 얻었다. 리버사이드 시 의회에서 최종 통과 또한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했다.

◇독립 운동사 다시 쓰는 계기

파차파 캠프의 건물이나 유물들이 보존되지 않아서 역사 유적지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리버사이드 시는 에서 파차파 캠프를 미주 한인 최초의 한인촌으로 인정하는 문화 관심지 (City Point of Cultural Interest)로 지정하는 시 조례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는 초기 미주 한인사와 도산 안창호의 독립 운동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처럼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초석을 다진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지역이다. 필자가 발굴한 새로운 자료와 사료들을 통해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으로 불린 리버사이드 한인촌이 미국 최초의 한인 타운이며, 도산 안창호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라는 것을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으로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한인촌이 유지되고 발전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리버사이드 한인촌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사적지 지정과 함께 자녀들에게 알려 주면서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면 좋겠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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