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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1979년 혁명 이끈 '킹메이커' 라프산자니

83세로 별세한 전 이란 대통령
스승은 호메이니 5차례 투옥
시장경제 도입 거액 치부설도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이끈 1세대로 '킹메이커'로 불린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8일 서거했다. 83세.

이란 국영방송은 "라프산자니가 이슬람과 혁명을 향한 쉼없는 여정 끝에 천국으로 떠났다"며 이 같은 소식을 전했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전해졌다.

고인은 이란인들이 이란을 위한 축복이거나 혹은 저주로 여길 정도로 굵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79년 이란혁명의 주역이자 최고 지도자(종교지도자로 사실상 국가 원수)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의 관계 속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실용주의적 인물로 분류되나 개혁 진영과 손잡기도 하고 때론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권위주의자이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마키아벨리적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34년 부유한 피스타치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신학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났다. 스승이 호메이니였다. 63년부터 78년까지 이란 왕정에 반대하면서 5차례 투옥됐다. 당시 이라크에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다.



이란혁명 후엔 종교 지도자(아야톨라)였지만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권력 수뇌부의 내로라하는 자리를 지켰다. 79년 11월부터 9개월간 혁명 정부의 내무장관에 임명됐다. 이듬해엔 이란 의회(마즐리스) 의장으로 선출돼 9년간 재임했고 89년부터 97년까지 대통령으로 지냈다. 83년부터 최근까지 34년간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위원이었다.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기구다. 89년부터 국정조정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이란.이라크 전쟁(80~88년)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치부했다는 구설도 있다. 2003년 포브스는 라프산자니를 10억 달러가 넘는 거부로 추정하기도 했다.

89년 호메이니 사후에 현 하메네이를 최고지도자로 선출하는 데 결정적 영향력을 행세하기도 했다. 둘은 이후 때론 협력 때론 긴장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고인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시기는 강경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으로 지내던 2005년부터 2013년까지다. 2005년 자신이 대선에서 맞섰다 패배했고 2009년 온건파인 후세인 무사비를 밀었으나 실패했다.

2013년 대선에선 실용적 중도파 하산 로하니 후보를 지지해 대통령이 되는 데 기여했다. 로하니 대통령이 서방과 핵 협상을 추진하는 데 내부 강경 보수파의 공격을 무마하는 데도 도움을 줬다. 이 과정에서 하메네이와 충돌하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고인은 이란 정치에선 일종의 균형추 같은 역할을 했고 최근엔 강경 보수파가 득세하는 걸 막아줬다"며 "그의 급작스런 사망은 상대적으로 개혁파엔 손실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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