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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집안에 배우는 안된다던 어머니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23)
2세들: 할리우드 영화배우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아들 안필립 (상)

도산 안창호의 장남 안필립은 아버지가 오랜 세월 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안씨 집안의 가장으로서 집안을 돌보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했다.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그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할리우드로 진출해 배우로 성공할 수 있었다.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 거리에는 안필립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필립은 아시안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배우로 수많은 아시안계 영화배우들에게 귀감이 되는 개척자이기도 하다.

안필립은 200여 편이상의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다른 동양계 역할을 맡으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특히 1970년대 미국 안방극장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쿵푸'에 마스터 칸으로 출연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필립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꿈꾸며 노력해온 독립운동에 동감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비록 미국에 살고 있지만 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안창호의 장녀이자 필립의 누이동생 안수산이 오빠를 기억하며 1980년에 인터뷰했다.



오빠는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 우리를 깊이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오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빠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다. 나는 오빠와 자주 다투었는데, 오빠가 한국식으로 나를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는 걸 내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오빠는 한국 문화를 미국 사회에 소개했다. "만약 너희가 한국 문화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면 오히려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거야." 오빠는 우리에게 상 차리는 법을 가르쳤다. 오빠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다.

오빠는 또한 아시안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오빠는 품위를 지키면서도 백인 전용의 벽을 무너뜨렸다. 백인들은 그런 오빠를 인정해 주었다.

안창호의 막내아들 랠프가 큰형인 필립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은 무척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는데 형은 동양인에게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곳을 과감하게 출입하며 장벽을 무너뜨렸다. 형이 무언가 특별한 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단지 자신이 그곳에 가고 싶었던 바람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형이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안을 이끌어 갔다. 물론 서로 분쟁도 있었지만 장남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희생하면서 우리 가족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갔다. 형은 읽기를 즐겼고 한국어도 잘했기 때문에, 한국적 태도와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형은 자연스럽게 한국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했다. 특히 장남으로서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이 있었다. 그 당시 부모님은 장남인 형에게 반드시 한국어로 말씀했다. 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형은 아버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좌절감에 빠졌 다. 그는 일본 영사관에 항의하고 상해에 있는 변호사와 자주 연락하면서 아버지의 석방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형이 한국을 방문해 이승만을 만났을 때, 이승만은 "만약 네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한국은 지금쯤 통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의 글은 1970년 중국계 작가인 프랭크 진이 안필립과 했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다.

▶아버지는 혁명가였는가

아버지가 한국 정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혁명가는 아니었다. 단지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일본에 대항한 것이다. 아버지는 일본이 너무 강대국이기 때문에 무력 항쟁만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는 것을 독립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여겼고, 그를 위해 한국인들의 계몽과 교육을 강조했다. 당시 세계는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을 전혀 몰랐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에야 비로소 한국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리우드 배우가 되었는가

나는 USC에서 무역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할리우드에 진출할 기회가 생겨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그 당시 동양인은 모든 일에서 배척되었고 노골적으로 차별이 있었다. 지금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직업 선택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 동양인은 막노동과 서비스 업종에만 종사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역학을 전공하면서 조교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학교 풋볼팀이 주제인 영화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많은 학생들이 조연으로 출연해 응원하는 장면을 찍었다. 사실 나는 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하루에 7달러 50센트를 주고, 점심까지 제공한다니 솔깃했다. 1930년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

그래서 나는 파라마운트 영화사로 찾아갔다. 그만 길을 잃어 잘못된 방에 들어갔는데 그 방에 캐스팅 감독이 있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일거리를 찾는다며 대답했다. 그는 내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면서 "우리가 중국계 소년을 찾고 있다는 걸 아니?"라고 물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답하자, "괜찮아. 너는 중국 사람처럼 생겼으니까." 그러고 나서 그 캐스팅 감독은 나를 영화감독인 루이스 마일스톤에게 데려갔다. 영화감독은 나와 대화하고 나서,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너 같은데, 너는 영어를 너무 유창하게 잘 해. 우리는 영어가 서툰 세탁소 주인을 찾고 있거든. 그렇지만 와줘서 고맙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소 엉터리 영어로 감독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감독이 다시 나를 불러 "영화배우로 합격!"이라고 외쳤다. 그렇게 나의 배우 생활이 시작되었다.

영화감독 마일스톤은 훌륭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다. 그가 만든 영화에 동양인 역할이 필요할 때면 항상 내가 출연했다. 내가 출연한 첫 작품은 '무엇이나 가능'이었고 '장군이 새벽에 죽었다'라는 작품에도 출연했다. 우리 가족은 1가와 피게로어 거리에 살고 있었다. 동양인 최초의 여배우 애나 메이 웡은 우리 집 바로 밑에 살았는데, 애나의 아버지는 세탁소를 운영했다. 그 당시 중국인들은 건물의 앞쪽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뒤쪽으론 거주 공간을 두었다. 당시 애나 메이 웡은 '바그다드의 도둑'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었다.

애나는 훌륭한 여배우인 동시에 개척자였다. 그녀는 아주 멋진 컨버터블 자동차를 구입했는데 운전을 할 줄 몰라 내가 운전해서 영화 스튜디오로 데려다주고 저녁에도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어느날 애나를 스튜디오에 데려다 주고 기다리던 중, 더글라스 페어뱅크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찍고 있는 영화 '바그다드의 도둑'에 내가 출연할 수 있을지 테스트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분장을 하고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다. 분장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 물어보셔서 사실대로 얘기했다. 어머니는 영화 출연을 반대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전념하고 있는데, 내가 영화에 출연하면 아버지의 체면에 크게 손상이 갈 것이며, 특히 장남이 영화배우라면 우리 집안의 비하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바그다드의 도둑'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처음 영화를 찍고 나서 꽤 많을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 돈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스튜디오를 걷고 있었는데 리무진 근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봤다. 매 웨스트라는 유명한 여배우가 있었고 내게 오라며 손짓을 했다. 매의 보디가드가 나에게 다가와 그녀가 나와 말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매 웨스트는 함께 영화감독을 만나보자고 제의했고, 나는 나중에 영화감독과 만났다. 그녀가 캐스팅 감독에게 '아무거나 가능'의 출연료가 얼마인지 물었다. 당시 나는 일주일에 100달러를 받았는데, 매가 250달러를 줄 것을 부탁했다. 그 후 마일스톤 감독은 영화 '새벽에 죽은 장군' 출연을 위해 스크린 테스트를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을 계속 다니고 졸업해야 했기에 영화 출연에 관심이 없다고 전했다. 그런데 감독은 나의 출연료를 계속 올려주겠다고 제안해 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나는 곧장 학교로 가서 학장과 의논했다. 학장은 "할리우드에서 배우가 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데다, 특히 1주일에 350달러를 받을 수 있다니 굉장한 일이다. 무조건 영화 출연을 승낙해라. 할리우드에서 자네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다시 받아주겠다"라고 나를 독려했다. 그렇게 나는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고 결국 영화배우가 된 것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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