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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수 칼럼]노 조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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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1/2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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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서 걷는지가 여러 해 됐다. 아침에 개장하기 몇 시간 전에 출입문을 열기 때문에 거의 매일 아침 이곳으로 걸으러 가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몇 해 걷다 보니 거의 같은 시간에 마주치는 낯익은 얼굴도 많고 아침 인사할 때 서로 퍼스트 네임을 부르게쯤 된 사람도 꽤 있다. 가게들이 열기 전이니 여기 저기 뜨문 뜨문하게 걷는이들 외에는 사람도 별로 없다. 궂은 날씨에 신경 안써도 되고 여름에는 에어컨 때문에 더운줄 모르고 걷는다. 특히 추위를 많이 타는 우리 부부에게는 동절에 이보다 더 좋은 산책코스는 없다. 사시장철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용해 온 이 산책코스의 덕을 톡톡이 본 우리 부부는 가능한한 쇼핑은 이 몰에서 하기로 오래 전에 작정했다. 그런식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서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걷고 있었다. 두 바퀴를 돌고 마지막 세 바퀴째였다. 키가 훌쩍 크고 늘씬한 백인 노인이 반대 편에서 걸어 왔다. “굿모닝”하고 지나치려는데 “혹시 한국인 아니세요?”하고 영어로 물어 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한쪽 손에는 종이 커피컵을 들고 있었다. 허리가 약간 꾸부정하고 나 보다는 열살은 더 먹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다. 학자같은 수려한 모습에 지성미까지 엿볼 수 있을 듯 했다. 밑도 끝도 없이 “한국 말로 ‘굿모닝’을 어떻게 하나요?”하고 물어왔다. “안녕하세요”라고 한다니까 “안녕하세요”하고 뒤따라 했다. ‘안녕’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몇 번을 고쳐주니 “안~녕, 안~녕...”을 염불 외듯 되뇌었다. 사연인즉슨 한국에 머무르며 여러 해 동안 영어교사를 하던 그의 손자가 한국인 여친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손자의 여친이 오면 한국 말을 한마디 해서 깜짝 놀래주려는 것이다. 손자를 몹시 사랑하는 것 같았다. 며칠 뒤 다시 만나니 자기가 먼저 “안녕하세요”하며 웃었다. 나는 그의 억양을 조금 고쳐 주었다.
나는 그가 은퇴한 대학 교수거나 무슨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쯤으로 추측하고 있었는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원래 세계 유수 쉘 석유회사의 파일럿이었다고 했다. 파일럿 생활이 떠돌이 생활이라 결국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가 자기 두 어린 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자식 사랑이 남다른 것 같았다. 그가 조종사가 되는 것이 그의 어린시절의 대망의 꿈이었다는 말을 미리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시절 캔사스 주 소 도시 비행장 부근에서 자란 그는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매일 보며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고 했었다. 어느날 비행장에 몰래 잠입했다가 그의 꿈 이야기에 감동한 어느 파일럿으로부터 비행 훈련을 받기 시작해 어린 나이에 조종기술을 익혔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한번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그가 영화 촬영 현지 로케를 위해 존 웨인을 콜로라도에 태워다 준 일이 있었다. 존 웨인이 담배 라이터를 비행기에 두고 내렸는데 존 웨인 생전에 돌려주지 못하고 지금도 자기가 그 라이터를 갖고 있노라고 했다. 그의 말로는 자기가 존 웨인 라이터를 훔친 것이라고 했다. (“I stole it from him.”) 남의 물건을 돌려주지 않았으니 자기가 훔친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참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몇주일이 지나서 그를 만났는데 으레 서둘러서 하던 ‘안녕하세요’가 없었다. 그의 손자가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한국에서 호주로 가기로 했다며 몹시 서운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손자 여친의 집안의 반대가 심한 것 같다며 자기는 이해한다고 했다. 자기의 추측으로는 두 사람은 아직도 연인 사이이고 호주로 함께 여행을 간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 후 석달이 지났는데 아직 그를 몰에서 마주친 일이 없다. 그 연인들의 후일담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노 조종사의 안부에 더 마음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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