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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먼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고향을 떠나본 일이 없는 사람이 어찌 고향을 그리워하랴. 명절이 다가오면 까마득히 잊고 살던 고향을 떠올린다. 고향을 그린다고 하면 사람들은 막연하게 태어난 곳을 생각할 것 같지만, ‘고향의 풍경’ 속에는 장소와 시간뿐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과의 추억도 들어 있는 것 같다.

내 고향도 꽃피는 산골이라면 좋겠다. 가끔 시골 출신의 친구들이 고향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다 보면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언제 찾아가도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인 강산이 있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정다운 얼굴들이 사는 곳이 내 고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서울태생이다. 유치원을 시작해서 가랑머리 여고 시절을 보내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명동과 무교동을 활보하며 대학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으니 추억이 어린 곳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어느 날, 찾아간 서울은 너무나 많이 변해서 내 유년시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낯선 나라에서 미아가 된 느낌으로 빌딩 숲 사이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면서, 나는 내 고향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대한민국 방방곡곡이 모두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한테 고향이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일상의 번잡함에서 비켜서고 싶을 때, 슬며시 떠올리면 웃음 지을 수 있는 추억이 있는 곳이다. 새로운 추억이 옛 추억을 지워 버리는 것처럼, 한국을 다녀올 때마다 내게는 새로운 고향이 생기는 셈이었다. 어느 해 여름엔 동해가 고향의 풍경이 되었다가, 어느 겨울엔 항구 도시 부산에서 생긴 일들이 고향의 추억으로 남았다.



어릴 적, 설날이면 임진각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우는 실향민을 본 적이 있다. 이민자로 살아온 내 삶도 그 실향민처럼 엉거주춤하였을 것이다. 마치 오랜 연인을 혼자 두고 온 것처럼, 꼭 해주어야 할 이야기를 가슴에 쟁여 놓은 것처럼, 수 십년 세월이 흘러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으리. 고향보다 더 익숙해진 이곳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렸구나, 하고 마음을 잡았다가도 지나던 거리 어딘가에서 고향과 흡사한 모습 한 자락 눈에 들어오면 흔들리는 마음은 또다시 나를 실향민으로 돌려 놓았다.

이제 미국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보다 더 고향답다. 이민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지만, 내 삶은 지극히 편안하다. 곱씹어야 할 불행이나 조바심치며 밤잠을 설칠 만큼 굴곡진 일도 없다. 내 일터가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사는 이곳에서, 나는 오래전 설계했던 대로 열심히 살았고, 이젠 인생의 꿈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나는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데 가끔씩 목구멍에 탁 걸리는 가시 같은 느낌은 무엇일까.

타향에 살아보아야 고향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젠 시간 밖으로 밀려나 회상으로밖에 볼 수 없는 고향이지만, 그곳은 나 혼자 머물다 가는 추억의 공간이기도하다. 떠나 왔다고 해서 어찌 고향이 사라질 수 있으랴.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 사라져 낡은 사진 속에서나 존재하는 곳이지만 고향이 없었다면 어찌 타국에서의 삶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이제 나는 안다. 고향이란 떠나왔다고 멀어지는 곳이 아니라, 변해버렸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 먼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내 마음에 비가 내리는 날을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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