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인물 오디세이] '돌판' 주문권 사장, "고난은 절망 아닌 전화위복 기회"

구두닦이·배달원·광부 등
10대부터 억척 생활력
98년 이민…식당 서빙하다
고객 투자로 '마당쇠' 열어

5년 만에 가게 7곳 확장
파산 후 식당 주방일 시작
4년전 고깃집 인수 재기
짬뽕·족발 등 사업 확장


뚝심이란 이런 것이리라.

새옹지마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전화위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냉정이며 동시에 열정. 물론 이런 내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리 만무하다. 넘어져 무르팍에 생채기도 나고 딱지도 앉으며 나무가 나이테를 더하듯 그렇게 삶의 지평을 넓혀 가는 것일 테니. 바로 그 삶의 경험에서 나온 뚝심 하나로 반백년을 살아온 남자 구이전문점 '돌판' 주문권(54) 사장이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수십 년 살다보면 특별한 사연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유독 마음을 흔드는 것은 실패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뚝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뚝심의 사나이를 그의 식당에서 만나봤다.

#광부에서 정치보좌관으로



강원도 강릉 출신인 그는 중학교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깡촌'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 유년시절 땔감을 주워 장에 내다 팔았고 중학생 땐 시내에 나가 구두닦이를 고교시절 방학엔 중국집 배달원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이 모험심 강하고 영민한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 1981년 강원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계가 급격히 기우는 바람에 휴학하고 한 학기 등록금을 한 달 만에 벌 수 있다는 강릉 탄광으로 가 광부가 됐다.

"탄광에서 일해 보면 막장이라는 말이 뭔지 실감하게 돼요. 2년간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그러나 그곳에서 모은 돈으로 집에다 전화도 놓고(웃음) 남은 학기 등록금도 벌 수 있었으니 고생한 보람은 있었죠."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인 80년대 중반 복학한 그는 총학생회 간부로 졸업 후엔 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하면서 전교조 활동을 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팔 걷고 나섰다. 그후 그는 안정적인 교직생활을 6년 만에 그만두고 1994년부터 강원도지사 특별보좌관으로 4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그 무렵 그는 메이크업아티스트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당시 아내가 미국 연수를 계획하고 있어 그도 관심 있던 정치학을 공부할 요량으로 1998년 미국행을 선택했다.

#바닥부터 일군 아메리칸 드림

가진 것도 아는 이도 하나 없는 LA에서의 이민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먹고 살기위해 페인트며 빌딩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 1999년 LA한인타운 '알배네' 짜장면 배달을 시작하며 식당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고기집인 식도락에서 일했는데 당시 타운 고깃집에서 서빙 하는 남자 종업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때였죠. 그래도 워낙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다보니 진짜 재미있게 일했어요. 그러면서 친하게 지내는 단골들도 생겼는데 그중 몇 분이 투자할 테니 식당 하나 차려보라 하더군요."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그가 식당을 한다면 분명 성공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하는 투자였으니 말이다. 제안을 받자마자 그는 LA한인타운 고깃집 17곳을 돌아다니며 맛과 서비스 등을 분석하며 창업 준비를 했고 2000년 버몬트 길에 '마당쇠'를 오픈할 수 있었다. 마당쇠는 당시 유행하던 무제한 고깃집이었는데 여기에 무제한 주류까지 더해 이목을 끌었다. 생에 첫 사업이었지만 남다른 콘셉트와 열정으로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매출은 쑥쑥 올랐고 그는 2003년 세리토스에 2호점 오픈을 시작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2004년 일식당 '나고야'를 비롯해 신선정육점 장터보쌈 등 5년 만에 식당이 7곳으로 늘어났다. 당시 매출만도 월 50만달러. 덕분에 베벌리힐스에 집도 사고 고된 이민 생활에도 여유가 찾아오면서 아메리칸드림을 일군 듯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가 터지면서 은행 융자금을 제때 상환지 못하면서 식당들은 은행에 넘어갔고 그는 파산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한 게 패인이었죠. 그때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간이었죠. 집도 차도 다 뺏겨 버스타고 출근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전화위복의 시간이기도 했죠."

#실패를 디딤돌 삼아

분명 남 보기엔 쫄딱 망했지만 그에겐 식당 사업가로 내실을 제대로 다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간 그는 마당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고기도 썰고 메뉴도 개발하며 하루 12시간을 꼬박 주방에서 보내며 제대로 된 요리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개발한 메뉴가 100여 개에 이른다 하니 당시 그의 노력과 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묵묵히 내실을 다진 끝 그는 2013년 지금 버몬트 길 '돌판' 자리에 있던 닭갈비 전문점을 인수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닭갈비를 접고 그 자리에 무제한 구이전문점인 '돌판'을 오픈했다.

"사업이란 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죠. 그래서 요즘은 제 스스로가 브랜드가 되려 노력중입니다. 단순한 사업가가 아닌 셰프로서도 최고의 브랜드가 되고 싶거든요."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작년 봄 한국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가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가진 전지훈련 캠프에 셰프로 초빙되기도 했다.

"당시 40일간 매일 85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어요. 선수들이 그동안 전지훈련하며 먹어본 식사 중 으뜸이라고 말해 줄 때 가장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맛은 입소문을 타고 한국까지 퍼져 지난 연말 한국 프로야구팀 kt위즈와도 계약을 맺고 지난주부터 애리조나 투산 전지훈련 캠프로 가 선수들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업도 날로 번창했다. 지난해 10월엔 '명가 짬뽕'을 11월엔 '명가 족발'을 오픈했고 LA한남체인 내에 호떡과 붕어빵 판매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직접 한국에 가 잘나간다는 대가들에게 제대로 비법을 전수받아 오기도 했다.

"다들 망한 경험은 아픈 상처라 생각하는데 전 그 경험이야 말로 돈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랬다. 전화위복이었다. 인생사 굽이굽이 맞닥뜨리는 고난을 길동무 삼아 걷다보니 넘어졌던 길조차 꽃길이었다. 그리하여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드라마 '도깨비' 중에서)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