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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워렌고교 데이비드 차 교사…동생 잃은 슬픔을 딛고 선 교육자의 길

교도소 9년 복역한 동생
한국 추방돼 3년만 사망
청소년에 도움 주고 싶어
전공 바꿔서 교사직 선택

가정 형편 힘든 학생들
대학진학 16년째 도와
교회서 노숙자 사역도
"용기와 희망 전하고파"


질문은 힘겨웠다.
평탄치 않은 가족사를 간직한 한 남자의 인생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 상처를 캐물어야 하는 건 꽤나 곤혹스러웠으니까. 그의 삶에 걸어 들어갈수록 냉정은 길을 잃었고 가끔씩은 눈가가 뜨거워왔다. 이 쉽지 않았던 만남의 주인공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데이비드 차(41)교사다. 스물도 채 안된 동생의 교도소행과 출소 후 사망까지. 그러나 그 힘겨운 시간을 거치며 그가 열정적으로 보여준 사랑과 나눔의 실천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했다.

#힘겨운 이민생활

그의 나이 열 살 되던 해인 1986년 미국으로 가족이민 온 그는 대학시절과 독립해 살던 7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LA한인타운에 살아온 타운 토박이다. LA로 이민 오자마자 부모님은 마켓에 취직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한국에서부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그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한 살 터울 남동생을 돌보며 쉽지 않은 이민생활 첫 발을 내디뎠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형제가 기댈 곳은 친구들밖에 없었다. 그러나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대부분이 갱 단원들이다보니 자의반 타의반 그곳에 합류하게 됐다.



"그때가 8학년이었는데 저는 얼마 뒤 금방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동생은 그러질 못했죠."

동생은 10학년 때 USA 주니어태권도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딸 만큼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결국 범죄사건에 연루돼 청소년 보호관찰 캠프에 구금되는 등 가족들을 늘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평탄치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도 그는 12학년 때 학년 학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고 그 해 여름방학 땐 LA타임스에서 인턴십을 하는 등 활발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또 인턴십 당시 선배기자의 권유로 자신과 동생을 소재로 한인 이민자 가정에 대한 칼럼을 써 주목을 받았다. 이후 칼럼을 본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방송 제안을 해와 1994년 가을 그의 가족 이야기가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학교에 희망을 심다

고교졸업 후 그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이루기 위해 UC샌디에이고에 입학해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그러다 그가 2학년 때 동생이 범죄사건에 연루, 체포돼 9년 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당시 가족에게 큰 충격을 준 동생을 원망했죠. 그때 어머니가 오래전 이야기를 들려 주셨어요. 제가 갱단에서 탈퇴하려 했을 때 그들이 제게 보복할까봐 동생이 자신은 남을 터이니 형은 제발 건들지 말라며 저를 보호했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줄곧 동생을 원망만 한 제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죠."

동생의 교도소행은 그와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그때 가장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이 출석교회 전도사님이셨습니다. 저희 가족을 위로하고 물심양면 도와주셨죠. 그 모습에 너무 감동받아 저 역시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그렇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접고 교사가 되기 위해 전공도 역사학으로 바꾸고 교직과목도 이수했다. 그리고 졸업 후 1999년부터 다우니 소재 워렌 고등학교에서 역사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교단에 서자마자 그가 팔 걷어붙이고 시작한 일은 바로 저소득층 학생들의 대학입학을 돕는 것. 그래서 그는 샌디에이고 소재 고등학교 근무 때 알게 된 저소득층 대학진학 장려 프로그램인 AVID(Advancement Via Individual Determination)를 워렌고에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LA카운티 교육부에 AVID 프로그램 내 SAT 수업 신설과 이에 대한 교사들의 전문적 훈련을 건의했다. 그렇게 1년간 꾸준히 요청한 끝 마침내 교육부가 이를 수용해 타 학교 교사들 10여명과 함께 겨울방학 3주간 SAT 교수법을 수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2001년 9학년 재학생 30여명을 모아 AVID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다.

#고난을 축복으로

"당시 아이들조차도 대학진학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죠. 그래서 제가 아이들과 약속을 하나 했어요. 낙오하지 않고 이 프로그램에만 있으면 반드시 대학에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요."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방과 후 일주일에 2~3차례, 하루 3시간씩 학생들에게 개인지도를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6~7시에 퇴근하기 일쑤. 시간외 수당이 지급되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의 이런 열정은 동료 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1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혼자였던 담당교사는 10명으로, 참가 학생들도 250명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동생도 좋은 멘토나 가이드가 있었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모르니까요."

그의 가족 모두에게 생인손에 다름 아니었을 동생은 2004년 출소했지만 영주권 갱신 문제로 한국으로 추방됐다. 1년 뒤 그는 한국으로 가 동생을 만나 그동안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2년 뒤인 2007년 동생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갔을 때 미안하다 말했어요. 좋은 형이 못 돼줘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서…그때 동생은 한사코 아니라고 하더군요. 충분히 좋은 형이었다고…."

끝맺지 못한 말의 행간 속 슬픔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 모든 걸 축복이라 믿는다고 했다. 믿기 힘들었다. '신은 감당할 만한 고난만 준다'는 오래된 명제에 신의 과대평가라 대꾸한들 누구하나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 앞에 축복이라니.

"고통과 고난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제 고난을 연결고리 삼아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어요. 무엇보다 제 이야기를 통해 상처받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회복되고 용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는 5년째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서 노숙자 선교사역인 '러브LA'에도 참가해 매 주일 거리로 나가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설교를 전하고 있다.

이처럼 고난을 축복으로 역전시키며 살아온 그의 삶은 100년 전 톨스토이가 했던 근원적 질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가장 명쾌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가 말했듯 사람은 걱정과 보살핌이 아닌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는.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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