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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웨딩플래너 케빈 리씨, 할리우드 스타들도 인정한 마이더스의 손

대학 때 LA와 꽃배달 시작
베벌리힐스서 꽃가게 오픈
상류층 스타들 사로잡아
웨딩·파티 장식으로 유명
98년 에미상 꽃장식 담당
그래미·오스카까지 도맡아
디스크 수술로 2년 휴식 후
세계적 웨딩플래너로 명성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들다.

열정적인 웨딩플래너이며 타고난 플로리스트, 그리고 영리한 비즈니스맨의 면모까지. 이 재주 많은 팔방미인은 오스카와 에미 시상식장 꽃장식을 담당한 플로리스트로 유명한 '케빈리웨딩스닷컴'(kevinleeweddings.com) 케빈 리 대표다. 최근 웨딩플래너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TV 리얼리티쇼까지 종횡무진 하는 그를 그의 LA 스튜디오에서 만나봤다.

#뮤지션, 플로리스트가 되다



서울 출생인 그는 부유한 사업가였던 부친 덕분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예원중·고를 거쳐 단국대 음대에 진학해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열두 살 때 부친의 사망과 함께 힘들어진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가족들과 함께 LA로 이민 왔다. 고교시절 누나를 쫓아 꽃꽂이 강습에 갔다 아예 전문가 과정을 이수할 만큼 꽃꽂이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LA에 오자마자 웨스트할리우드 한 꽃가게에 취직했다. 서툰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꽃꽂이 솜씨에 반한 가게 주인이 그 자리에서 그를 채용한 것. 그렇게 낮에는 꽃가게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며 하루 3시간도 자지 못하는 녹록지 않은 LA살이가 시작됐다. 그러나 꽃가게에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남다른 꽃꽂이 솜씨는 금세 입소문을 타면서 그만을 찾는 단골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각종 꽃꽂이 콘테스트에도 참가해 상을 휩쓸며 로컬 신문과 잡지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또 주말엔 개인적으로 실내 꽃장식과 결혼식 꽃장식 등을 의뢰받기 시작하며 수입도 점차 늘어 주당 1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1986년 베벌리힐스에 'LA 프리미어'를 오픈할 수 있었다. 오픈과 동시에 그는 베벌리힐스 부호들과 할리우드 스타들을 단골로 확보하면서 승승장구해 1년 뒤 800스퀘어피트짜리 매장에서 3000스퀘어피트로 확장 이전했다.

#화려한 성공시대

물론 그의 이런 화려한 성공 뒤엔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은 그의 노력과 땀방울이 숨어 있다. 사업이 번창해 직원 수가 늘어도 몸에 밴 부지런함 탓에 오전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LA다운타운 꽃시장을 들러 꽃을 사고 아무리 작은 부케 하나도 직접 손이 가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성공비결은 역시 할리우드가 반한 섬세한 솜씨와 안목.

"상류층을 상대로 사업을 하려면 제 눈높이도 그에 맞춰야 해요. 그래서 늘 최고의 패션과 인테리어 안목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죠."

덕분에 사업은 날로 번창해 직원 수만도 30~40명에 이르렀고 이들 중 5명은 전화주문만 접수하는 이들일 정도였다고. 또 하루 평균 꽃 1만 송이가 소요되고 밸런타인스데이 때면 1500여건의 주문이 밀려들었다고 하니 당시 LA 프리미어의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그의 실내 꽃장식과 웨딩 꽃장식은 상류층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베벌리힐스 부호들은 그에게 집안 꽃장식을 통째로 맡겨 로비부터 안방과 화장실까지 집안 곳곳의 꽃장식을 정기적으로 교체했다. 이런 고객 한 명이 그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월 1만달러 수준. 그러면서 그는 프랑크 시나트라, 로저 무어,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스타들과 고객으로 만나 시간이 흐르면서 둘도 없는 절친이 됐다. 특히 프랑크 시나트라의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의 요청으로 그가 영정사진을 들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8년 에미상 시상식 꽃장식을 맡으면서부터. 이후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그는 그래미와 오스카 시상식의 꽃장식을 담당하면서 명실상부 미국을 대표하는 플로리스트이며 이벤트플래너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러나 이처럼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2010년 디스크 수술 후 담당 의사는 '한 번만 더 같은 증세로 병원에 오면 휠체어를 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제야 그는 휴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당시 하루 3~4시간씩 자며 일만 했죠. 그러나 아무리 사업이 성공한들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이후 2년 동안 사업체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현장을 떠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죠."

#진정한 행복을 배우다

2년간의 휴식기를 거친 뒤 그는 웨딩플래너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그가 이전과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선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 십 수 년 간 그는 제니퍼 애니스톤·브래드 피트, 드류 베리모어,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 미국 최상류층 결혼식을 진두지휘해 왔다. 또 1991년 개봉된 영화 '신부의 아버지' 속 웨딩플래너가 그를 모델로 한 것인데다 2010년 케이블 TV TLC에서 방영된 '브라이드 오브 베벌리힐스'에서도 웨딩플래너로 출연하는 등 이미 그는 미 주류사회에서 각광받는 웨딩플래너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그가 지금껏 지휘해온 결혼식은 50~1000만달러에 이르는 초호화 예식이 대부분인데 예식장소도 LA, 뉴욕, 마이애미 등 미국 대도시는 물론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등 세계를 무대로 한다. 요즘도 이런 결혼식들이 한 달 평균 3건 이상 잡혀있다 보니 여전히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 이면 결혼을 앞둔 예민한 신부들을 상대하다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듯했다.

"특별히 힘들지는 않아요. 예비 신부들이 예민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해진 예산 안에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집행하느냐를 놓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면 다들 이해하고 잘 따라주니까요. 좋은 친구이며 냉정한 카운슬러인 셈이죠.(웃음)"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이 직업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좋은 친구들을 통해 인생을 배우게 된 것이야말로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한창 땐 성공만 쫓았던 적도 건방졌던 때도 있었죠. 그러나 돈도 명예도 남부러울 것 없는 고객들과 친구가 되면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것과 인생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은 짧은 인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결국 세상 모든 화려함의 끝에서 그가 배운 건 소박한 일상의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찾아 헤맨 파랑새는 바로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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