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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안재엽 변호사…꿈을 이루기 늦은 나이는 없다

서울대 법대 졸업
대기업서 13년 근무
억대 연봉 박차고
마흔에 미국 유학길

심리학·법학 공부해
석사학위 4개 취득
쉰에 변호사 시험 합격
가디나에 사무실 열어


여기 호기심 하나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가 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청년시절 꿈을 이룬 안재엽(51·미국명 데이비드) 변호사다. 지금껏 그가 취득한 석사학위만 4개라 하니 한 가지 학문에 꽂히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성격이 고스란히 읽힌다. 잘 나가는 한국 대기업 억대 연봉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꿈을 좇아 오늘에 이른 그를 만나봤다.

#억대 연봉 박차고 LA로

서울대 법대 84학번인 그는 3형제 중 막내로 형제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어머니 치맛바람이 거셌거나 혹은 대대로 수재 집안이었냐는 농 섞인 질문에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아니에요. 가난한 공무원 집의 평범한 형제들이었죠. 공부야 해야 하는 거니까 그냥 알아서들 한 거고요."

장황하게 자랑을 늘어놓을 법도 한데 담담하다 못해 싱거운 답변만이 돌아왔다. 자기자랑엔 별 소질 없어 보이는 이 수재 청년은 대학 졸업 후 연대 대학원에서 헌법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대학 선·후배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시에 낙방한 뒤 강단에 서는 걸로 진로를 바꿨다. 그래서 독일 유학을 계획하고 유학자금 마련을 위해 1993년 연봉 높기로 소문난 캐피털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3년 반 뒤 그는 삼성생명으로 자리를 옮겨 법무팀 및 재무기획팀 등에서 근 10년간 재직했다.

"당시 형님들이 모두 유학중이었는데 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 계셔서 유학을 갈 형편이 아니었죠. 그러다 99년 어머니마저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지시면서 한동안 유학에 대한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모친은 뇌사 판정을 받고 병상에 있다 2011년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이렇게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인지, 진정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인지 말이죠. 그러면서 심리학과 기독교 상담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죠."

그래서 그는 퇴근 후 유명 정신과전문의가 운영하는 정신분석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심리학 서적들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학중이던 형제들이 귀국하며 본격적으로 심리학 공부를 해보고 싶어 미국 유학을 계획한다. 그 후 2년간 그는 퇴근 후 토플과 GRE 등을 공부하며 미국 대학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사직 후 그해 8월 패서디나 소재 풀러신학교 심리학대학원 가족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억대 연봉과 코앞에 둔 승진을 박차고 한 결정이었다.

"당시 기독교 상담학을 공부해 보고 싶은 열망이 컸죠. 그리고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건 제 인생에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선택했습니다."

#다시 법조인의 꿈을 좇아

2년 뒤 그는 가족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결혼 및 가족치료(MFT) 석사과정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2008년 여름 샌퍼낸도밸리 커뮤니티 정신건강센터에서 1년간 수습상담사로 근무하며 트레이니십을 했다. 그러나 1년간의 트레이닝 후 그의 미국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9년 예정대로 MFT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후 일자리 찾기는 힘들었고 체류신분 문제 역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후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보딩케어와 양로보건센터 등에서도 일했지만 전문적인 경력을 쌓기는 힘들었다.

"아마 그 무렵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 살겠다 결정은 했지만 커리어를 쌓기가 힘들었고 체류신분 문제까지 있어 정말 앞이 막막했거든요."

평생을 모범생으로, 명문대생으로, 잘나가는 대기업 사원으로 엘리트 코스만 밟고 살아온 그에겐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 싶었다.

"엘리트 의식요? 어휴 그런 게 어딨어요. 한국에서 10년 넘게 직장생활하면서 그런 우월의식이 사라진지 오래고 더욱이 미국 와 힘든 시간들을 거치면서는 더 이상 한국 배경이 걸림돌이 되진 않았어요."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나는 동안 그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돼 준 것은 그 무렵 만난 아내다. 2011년 임상 간호사(NP)인 아내 고정화(48)씨와 결혼 후 그는 2012년 법대 진학을 해 변호사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결혼 후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청년시절 못다 이룬 변호사의 꿈에 도전한 거죠."

#지천명, 변호사가 되다

그는 채프만 유니버시티 법대에 진학해 외국 법대 학사학위 소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석사 과정을 시작해 이듬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생애 4번째 석사학위였다. 미국에 유학 와 심리학 및 상담학 관련 학위를 취득하느라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까울 법도 했다.

"물론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단순히 케이스가 아닌 한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좋은 변호인이 될 수 있다 믿으니 지금 돌이켜봐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죠."

그리고 지난해 그는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이달 초 가디나에 이민법 전문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취업비자로 체류했지만 저도 영주권이 없어 힘들었던 적이 있어 신분 문제로 고생하는 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죠. 무엇보다 제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고통가운데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무실 명도 이런 뜻을 담아 '컴패션(compassion)법률그룹'이라 지었다. 그렇다고 그가 늘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부터 즐겼던 클래식 음악 감상부터 등산, 스포츠댄스, 합기도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할 때는 휴가 때마다 유럽 미술관 순례를 떠날 만큼 미술에도 관심이 많다. 그리고 LA에 와서는 지인들과 프랑스 철학연구모임을 꾸려 니체, 푸코 등에 대해 공부하는 등 그는 예술과 철학 분야에 관심이 지극하다. 그런가하면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 이사, LA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실행위원을 맡아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등 커뮤니티 봉사에도 열심이다.

"큰 뜻이 있다기보다는 한인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것뿐이죠. 그렇게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이 조금은 특별한 늦깎이 변호사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괴테의 말처럼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으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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