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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동 해본 적 없지만 손빨래로 생계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35)
딸들 :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살았던 개척자 이메리(중)

도축장서 버리는 내장 부위 얻어
바닥에 떨어진 과일들 모아 먹어
겉으로 학교에선 차별 않는 척
'백인전용' 화장실 사용 힘들어


아버지(백신구)는 목사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힘든 육체노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송경도)를 위해 종종 집안 살림을 돕곤 했다. 아버지는 작은 선반을 만들고, 쓰레기장에 우리를 데려가 쓸만한 물건들을 주워 오게 했다. 우리가 주워 온 작은 바퀴로 아버지는 마차를 만들었다. 명과 나는 아주 친했는데 우리 아래 태어난 여덟 명의 동생들을 함께 돌보았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열 가족 중 노총각이 30여 명 쯤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돈을 조금씩 받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3~4시 쯤 일어나 노총각들을 먹일 음식을 만들었다. 나 또한 매일 3시에 일어나서 노총각들의 점심 도시락을 싸는 것을 도왔다. 노총각들의 반 이상이 자전거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일터까지 매일 5마일을 걸어 다녔다. 그들이 일하는 오렌지 과수원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꽤 멀리 있었다.

우리는 밀가루 마대 자루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머니는 1913년까지 재봉틀을 구하지 못해 손바느질로 옷을 지었다. 우리는 풍족하지 않아 끼니를 때우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하루에 물과 조그만 비스켓 한 조각을 삼등분해 먹으면서 버틴 적도 있었다. 그렇게 보낸 1년이 그땐 마치 10년과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특히 아버지는, 그러한 삶에 대해 절대 불평하지 않았다. 대신 하느님께 항사 감사 기도를 드렸다. 목사의 자녀로서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 예배를 드렸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침, 저녁 예배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배 시간에 짜증만 났다. 이런 우리를 보고 아버지가 "하느님, 우리 가정에 내려주신 축복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이렇게 묻곤 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떤 축복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일을 이야기하며 나와 아버지는 자주 웃는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 도축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곳에선 매주 토요일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도축을 했다. 미국 사람들은 가축의 심장, 간, 신장, 꼬리, 양과 같은 내장 부위를 먹지 않기 때문에 도축 후 내장을 모두 버렸다. 아버지는 도축장에서 이렇게 버려지는 부위들을 얻어와 우리에게 먹였다.

어느 날 도축장의 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내장 부위를 먹겠다고?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부위를 먹는 너희들은 역시 더러운 중국인일 뿐이야!"

아버지는 우리가 이런 비웃음을 듣고 마음이 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밖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렸다. 도축장 밖에는 많은 한국인 아이들과 멕시칸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우리는 도축업자들이 내장 부위를 버리는 늦은 오후까지 그곳에서 기다렸다. 이처럼 그 당시 우리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우리에게 손가락질하며 "네가 인간이냐?" 라고 모욕했다.

중국인들은 자주 폭력을 당했다. 어떤 백인들은 술에 취해 중국인들을 향해 총을 쏘고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했다. 백인들은 죽어가는 중국인들을 보고 잔인하게 웃었다. 오래된 카우보이 사진을 보면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토끼 사냥하듯 죽였다.

우리 가족은 리버사이드에서 살다가 클레어몬트로 이주했다. 통조림 공장 너머 철도 옆에 살았다. 리버사이드에서처럼 과일 따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빨래 일을 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가 좋지 않은 오렌지나 레몬 같은 과일들을 모아서 먹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살면서 학교도 다녔다.

학교에 갔던 첫 날,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하와이에서 우리 가족은 도착 직후 바로 농장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농장 밖 백인들의 얼굴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 또한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겐 송씨라고 불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송씨 아저씨가 우리를 학교에 입학시켰다. 우리는 송씨 아저씨의 손을 잡고 거의 1마일을 걸어 학교에 갔다. 우리가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이 무리 지어 있었고, 어떤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나는 그때 그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었는데, 후에 우릴 놀리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특히 "칭칭 중국 놈, 꼬리를 잘라버리자"라는 부분을 부를 때 팔짝팔짝 뛰면서 나를 툭툭쳤다. 나중에 아이들이 부르는 이 노래의 뜻을 알았을 때, 나는 몹시 화가 났다. 학교에는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선생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밝은 노란 머리와 큰 파란 눈을 가진 독일계 여성 교사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물끄러미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나에게 그 선생님의 모습은 두려웠고 악마같이 보였다. 선생님이 나에게 뭐라고 했는데, 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단지 한국말로 "나는 몰라요"라고 소리쳤다. 그때 송씨 아저씨가 나를 뒤쫓아 왔다. 아저씨는 웃으며 나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네가 선생님을 두려워했듯이, 그녀 또한 네가 두려웠을 거야."

클레어몬트에 살 때 어머니(송경도)는 임신을 했다. 어머니의 키는 4피트 10인치밖에 안 되었고, 몹시 마르고 허약했다. 그런 어머니는 집에서 열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항상 어머니 곁에 머무르며 2주 동안 어머니의 산후 조리를 도왔다. 아버지는 정말 좋은 남자였다. 그리고 나와 명이도 어머니의 출산을 도왔다.

겉으로 우리는 학교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인 아이들은 우리가 교실 안에 있을 때만 화장실에 가는 걸 허용하고, 밖에서는 갈 수 없게 했다. 화장실에는 '백인 전용'이라는 큰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버스나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면, 아버지는 우리의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이기 위해 음식을 먹거나 물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수영장이나 영화관 또한 이용할 수 없었다.

1922년에 우리는 애너하임에서 얼떨결에 영화관에 들어가 앉았던 적이 있었다. 좌석 안내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에잇, 여기서 뭐해?" 나는 안내원에게 되물었다. "왜요?" "너는 여기 앉을 수 없다." "왜요, 아무도 없는데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여기에 앉을 수 없어. 당장 나가!" 나는 지불한 영화비를 돌려달라고 하면서 영화관에서 나왔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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