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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20] 잃어버린 수첩

[LA중앙일보] 발행 2007/01/02 미주판 19면 기사입력 2007/12/31 17:01

김완신 (편집 부국장)

지난해 연말에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던 수첩을 잃어버렸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취재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연락처를 기록한 수첩이었다.

수첩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느 곳에도 없었다. 수첩을 잃어버리자 마치 낯선 여행지에서 지도를 분실한 것처럼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당장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려고 해도 방도가 없었고 취재처의 경우는 주위 동료들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통화해야만 했다. 있을 때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여기저기 굴리던 수첩을 막상 잃어버리고 나니 답답한 마음 뿐이었다.

수첩을 분실한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 수록 불편한 마음만 들었을 뿐 실제로 생활하는데 불편하지는 않았다. 찾을 수 없는 수첩에 대한 미련은 있었지만 수첩 분실로 별다른 지장을 받지는 않았던 것이다.

수첩에는 수백명의 연락처가 기록돼 있었다. 그럼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업무가 됐건 사적인 통화가 됐건 자주 전화를 걸었던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여러 사람들과 행복한 인연을 맺고 살았다. 업무적으로 잠시 지나쳐간 경우도 있지만 오랜 친구처럼 정을 나눈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연락처를 적은 수첩을 잃어버려 연결이 끊어졌지만 일상에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상대방이 용건이 있으면 전화를 걸어 올 것이라는 이기적인 마음까지 들었다.

수첩에 빼곡하게 적혀진 많은 사람들 중에 자주 안부를 전하고 안녕을 묻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던가. 소중한 인연의 기록이었던 수첩이 한갖 종이쪽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고 무심했던 한해를 반성하게 된다.

이제 2008년 새해가 밝았다. 인도 캘커타에 테레사 수녀가 세운 '어린이 집'에는 '역설적인 계명(Paradoxical Commandments)'라는 글이 적혀 있다. 미국 작가 켄트 M. 키스의 작품이다.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을 베풀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하다 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장영희 번역)"

수첩을 잃어버린 후 우연히 읽게 된 시였다. '역설적인 계명'이라는 관념적인 제목의 시였지만 내용은 올 한해를 살아가는 지침처럼 다가왔다. 지난해 세상과 주위 사람들에게 무심했던 이기적인 마음을 반성하게 하는 경계의 글이 됐다.

올해부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고 솔직하고 선을 행하며 그리고 최상의 것을 주는 생활을 해야겠다. 스스로가 다가가지 않고 오기만을 기다린다면 그 인연은 멀어져 갈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수첩을 찾고 있다. 어쩌면 그 수첩을 영영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새로 수첩을 만들고 또다시 한줄한줄을 채워가야 한다.

올해에는 새 수첩에 담겨질 모든 이들의 연락처를 무심한 번호가 아닌 숨이 있는 따뜻한 인연으로 적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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