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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그레이 칼럼] 환금 작물

일본의 압박을 받은 36년의 치욕스런 세월의 상흔은 한인들의 정서에 영원한 상처를 입혔다. 세월이 지나면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된다지만 해방된 지 72년이 되어가는 아직도 이웃인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당신이다. 두 나라 사이에 화해의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는 한인들의 가슴속에는 반일감정 멍울이 있다. 그 멍울은 미국에 사는 내속에도 있다.

조상들이 당한 굴욕으로 일본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이런데 하물며 수백 년 동안 비인간적인 상품 취급을 당한 조상을 가진 흑인들은 오죽하랴. 스티븐 헤이스 (Stephen Hayes)의 작품전 ‘환금 작물 (Cash Crop)이 몽고메리 다운타운에 있는 로사 파크 기념관에 열리는 것은 벌써 알았다. 그러나 전시회 안내 사진에 가슴이 섬뜩해서 근처를 지나면서도 멈추지 않았지만 흑인 역사의 달인 2월의 마지막 날, 용기를 내서 전시장을 찾아갔다.

모빌 미술관 한쪽에 앨라배마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모빌 항구로 들어온 노예무역선에 관한 기록을 봤을 적에 마치 내가 죄인같은 기분이 들었다. 쇠사슬에 굴비처럼 엮여서 짐짝으로 빼곡하게 실려 미국에 온 흑인들과 달리 나는 편안하게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왔다. 선박의 하단에 서로 포개져서 대서양을 건너느라 3-4개월 밤낮으로 시달리는 동안 사망한 흑인들은 바다에 내던져졌고 미국땅에 도착한 생존자들을 기다리는 것도 악운이었다. 그들은 소나 돼지처럼 시장에 내세워진 상품이 됐고 자유와 인권이 없는 노예가 됐다.

아프리카 고향에서 가족과 생이별하고 잡혀온 사람들이 낯선 대륙에서 노예로 살면서 이룬 가정에서 다시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 팔려가는 생이별을 감수했다. 기본권이 묵살된 사회환경에서 흑인들이 겪은 처참한 생활상과 아픔을 감히 어떤 언어로 표현하나.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19세기 미국의 상업은 번영했다. 노예를 담보로 돈을 빌리기도 했으니 흑인들은 상품과 자산의 가치로 존재한 온전한 환금 작물이었다. 그 당시 노예들은 신생국인 미국경제의 가장 큰 자산이었고 특히 남부는 오랫동안 부와 번영을 누렸다. 노예제도로 부강한 미국의 아이러니다.



피한다고 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무거운 침묵이 드리운 넓은 전시실에 들어서 노예선 아이콘을 시멘트로 찍은 표본과 정면으로 마주선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과거를 만났다. 수 많은 숫자의 노예선 아이콘들이 담겨진 나무 박스들이 휘어져 파도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차곡차곡 쌓인 그 앞 의자에 앉았다. 이루 말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이 출렁이는 물결 소리로 다가왔다.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경악과 눈물에 한숨까지 섞인 기이한 고통의 신음들이 서서히 표면에 나서는 바람에 당황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환금 작물’ 타이틀 아래 검은 프린트로 줄줄이 찍힌 노예무역선의 아이콘을 퀼트로 연결시킨 거대한 벽장식 앞에서 나는 평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런데 정작 나의 모든 감정을 마비시킨 것은 죽 늘어선 어린아이들과 여자와 남자의 형상을 가진 실물 크기의 15 조각상들 앞에서 였다. 각 조각상 마다 노예로 잡혀온 백만명의 존재를 대변한다니 끔찍이 많은 숫자의 희생자들이 줄섰다. 침통한 표정을 가진 잿빛 형상들의 목에는 두터운 쇠 목걸이가 채워져 있고 허리와 손목과 다리는 쇠사슬로 엮여 있었다. 쇠사슬의 무게가 나를 눌렀다. 억울함을 하소연조차 못하는 그들의 눈물은 굳었고 영혼조차 시멘트로 단단하게 굳었다. 마치 쌀과 돌을 고르는 키를 쓴 것같은 조각상의 뒷면 목판에 새겨진 노예무역선의 아이콘에 눈이 따가웠다. 조각상들은 이민 초기에 보고 경악했던 TV 미니시리즈 ‘뿌리 (Roots)’의 충격을 생생하게 되살려줬다.

일제치하 36년의 과거를 잊지 못하는 나에게 4백년 이어진 흑인들의 고난사는 언제나 강력한 영향을 준다. 아직도 공공연히 일어나는 피부색을 차별하는 편견을 보면 아픈 과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늘도 계속됨이 안타깝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진리가 무색한 현사회에서 모든 종류의 차별대우는 모두가 노력해서 해소해야 하는 문제임을 일깨워준 작가의 의도가 완전히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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