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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민주주의는 피를 먹지 않는다

인류학의 고전인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는 로마 인근 네미 호수를 둘러싼 디아나라는 신성한 숲에 얽힌 이야기로 시작된다. 풍요의 여신 디아나와 남편 비르비우스를 섬기는 신전이 있는 숲에는 황금색 가지의 나무 한 그루가 있고 한 남자가 칼을 들고 밤낮 없이 나무를 지키고 있다. 이 남자는 숲의 왕이며 신전의 사제임에도 초조하게 나무 주변을 서성인다. 마을의 남자는 누구든 황금가지만 꺾으면 사제이며 왕인 이 남자를 죽일 수 있다. 잠들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자신보다 힘이 센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 사실 자신도 전임 왕을 죽이고 숲을 차지했다. 그러니 그도 누군가의 손에 죽을 운명이다.

'황금가지'는 프레이저 경이 자문한 '네미 숲의 왕은 왜 규칙적으로 살해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답은 왕의 쇠약은 공동체의 쇠약을 부른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공동체가 가장 강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가장 강한 이가 왕이 돼야 하는데 영원한 젊음은 없으니 누구든 왕을 죽이게 하면 계속해서 가장 강한 왕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의 승계는 시대와 문명을 가리지 않고 인류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가장 오래된 승계법은 숲의 왕처럼 폭력적인 것이었다. 물리적 힘이 센 자가 폭력으로 권력을 갖는 것이다. 문제는 숲의 왕처럼 한 명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 단위에서 폭력이 충돌하면 그 피해는 공동체의 생명 자체를 위협한다. 내전, 쿠데타, 유혈사태, 숙청처럼 피 냄새가 진동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서 눈여겨볼 것은 유혈 사태가 없었다는 것이다. 촛불시위에는 작은 폭력사태도 없었다. 또 탄핵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법에 정해진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모든 정치체제의 최종 핵심은 누가 어떻게 누구에게 권력을 주고 회수하느냐의 절차다. 그 과정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 민주주의다.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도 쿠데타와 폭력 진압, 폭력 시위, 유혈 사태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세계에는 형식은 민주주의지만 권력이 유혈사태로 승계되는 나라가 적지 않다.

이번 탄핵이 한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준 이유는 권력을 평화적으로 회수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것처럼 권력도 주기는 쉽지만 회수하기는 어렵다. 받기는 쉽지만 주기는 어렵다. 헌법이 정한 임기 중에 법절차를 모두 밟아 평화적으로 살아있는 권력을 회수한 사례는 어디에서도 극히 드물다.

탄핵을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다. 한때 탄핵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촛불만으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런 주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탄핵반대 시위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가 나서라는 등 험한 주장이 튀어나왔지만 실제로 그런 시도는 없었다. 탄핵이 됐느냐 안됐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었다. 유혈 충돌도 없었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한때 한국도 속했던 숲의 왕의 방식이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과정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는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의견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만 절차에는 합의하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유명한 금언이다. 극심한 차별에 병사들이 들고일어난 '셰이즈의 반란' 소식을 들은 토머스 제퍼슨이 "자연계에 가끔 폭풍이 부는 것이 필요하듯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썼던 데서 유래했다. 피를 흘리며 독재와 싸워야 했던 나라에서 많이 인용된 말이다. 한때 한국에서도 자주 사용됐다.

형식만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랄지 모른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그렇지 않다. 절차를 먹고 자란다.


안유회 논설위원 ahn.yoohoi@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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