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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새로운 출발

수잔 정/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이번엔 개인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재혼을 했다. 먼 곳 오하이오주에서 백마 대신 비행기를 타고 나타난 기사와. 오하이오와 캘리포니아 사이의 수천 마일을 달려와 20여 번이나 데이트를 해 1년 만에 나와 결혼한 사람은 연세대 의과대학 선배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본 후에는 이별의 고통이 죽음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고 "만남은 헤어짐의 전제 조건"임을 배워버린 셈이다. 아무리 흰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살겠다고 약속했어도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따로 가야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 먼저 간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던 버릇을 던졌다. 7년이 지난 후에야….

다행히도 미국 사회는 편부모 노릇이나 홀로서기 연습을 하는 나 같은 철부지에게 공평했다. 그래서 또 다른 7년은 땅위를 딛고 서서 걸음마하는 것을 익혔다. 서툴지만 자동차를 관리하고 제 때에 세금 내는 것도 힘껏 따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용서하는 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아마 성장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리라.

세 아이들이 자신들의 나래를 펴고서 마음껏 날아갈 수 있도록 부여잡았던 끈을 풀어 주었다. 나의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아집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집안의 '가장'이 된다는 무거운 중압감과 책임감으로 나 하나를 추스리기도 힘에 겨웠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놓아준 아이들은 오히려 더욱 신중하게 자신들의 길을 개척한 듯 했다. 우리 모두 '제 앞가리기'에 바쁜 세월이었다. 불평할 곳도 받아줄 사람도 없는 진공의 상태에서 나는 나의 약점을 끌어 안으며 사는 것도 배웠다. 모르면 물어보고 실수를 연발해도 계속 앞을 보며 가야 했다. 그러면서 가끔은 '기특한' 자신을 쓰다듬으며 희망을 잃지 않아야 했다. 한번 나락에 떨어진 후에는 얼마나 다시 일어서기가 어려운지를 뼈저리게 겪어본 후였으니까.



그러면서 어느 날 '혼자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힘든 것도 아님을 알아냈다. 10여 년이 지난 후였다. 누구인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고 헤어짐의 공포로부터 치유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결점 투성이고 침착성이 없는 성질의 나를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 주는 현재의 남편을 만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홀로 산지 14년째였다. 같은 학교를 다닌 선후배란 공감대가 든든한 받침대였다. 각기 다른 경험의 차이 세대의 차이 그리고 가치관의 차이를 극복하며 우리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용기를 주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서로의 잃어버린 배우자 묘소를 찾았다. 나의 전 남편 무덤 앞에서 그는 "영숙이를 행복하게 돌보아 주겠네!"라고 약속했다. (나의 전 남편도 연세대를 졸업한 그의 후배다.) 고인이 된 그의 아내는 시어머니 옆에 안장되어 있고 노란 국화가 꽂혀 있었다.

"앞으로 잘 살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남편은 어머니와 전 부인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들의 따뜻했던 옛사랑과 가정의 행복이 나에게 모두 전이되어 오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나누어서 공유했다. 그리고 더욱 풍성해졌다. 앞으로의 새 삶이 어떻게 전개되어 올지 가슴 두근거린다. 그리고 매일이 새롭다. 보석을 닦아내듯이 귀중하게 다루며 찰나를 즐기리라. 새로이 얻은 보너스의 삶 꿈과 같은 사랑의 이중주를 열심히 연주하며 제2의 성인기를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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