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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국 대선과 미국 대통령의 문법
김환영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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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17/03/20 미주판 9면    기사입력 2017/03/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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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언어 문화는 문법·어법상의 잘못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미국에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사회적 관심이 많기에 문법과 연관된 화젯거리가 자주 기사화된다. 예컨대 경제 주간지 포브스는 2013년 3월 11일자에 문법 실력이 좋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더 빨리 승진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에는 '문법 잘 틀리는 사람은 절대 사원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최고경영자(CEO)도 있다. 문법 잘 아는 사원이 일처리가 꼼꼼하다는 것이다. 반대 캠프의 입장도 강경하다. 2016년 3월 미시간대 연구에 따르면 남의 문법 실수에 민감한 사람들은 '성격이 나쁜' 편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문법 나치스(Grammar Nazi)' '문법 경찰관'으로 불린다.

미국 매체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와 손잡고 대선후보들의 언어 수준을 측정한다. 미국 역대 대통령과 본선 주자들이 초·중·고 몇 학년에 해당하는 말을 구사했는지 데이터가 축적돼 있다.

지난 미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의 '황당하게 낮은' 언어 수준을 언론이 즐겨 기사화했다. 평가 기관과 시점에 따라 초등학교 3·4·5·6학년으로 측정됐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런 기사를 읽으며 내심 흐뭇했을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는 중학교 3학년 수준으로 말하는 힐러리 클린턴을 이겼다. '문법 좀 틀리면 어때'가 트럼프 지지자들의 심정을 요약하는지 모른다. 또한 미국에서 쉬운 말 소통은 장기적인 추세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이임사는 고2~대학교 1학년 수준이었다.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1933~45년 재임)는 쉽게 말하기 추세를 본격화했다. 트럼프의 신통치 않은 영어 구사력은 추세 속에 파묻혀버렸다. 선례도 있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영어 구사력은 트럼프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데이터를 살펴보면 의외의 사실도 발견된다. '부시즘(Bushism)'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언어장애자'로 취급당한 부시 대통령의 영어 구사력은 사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존 케리 후보와 별 차이가 없었다. 2004년 9월 토론에서 부시는 초등 6학년, 케리는 중1 수준이었다. 토론에서 부시 화법의 강점은 주제문을 두괄식으로 내세우고 주제문의 근거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 것이었다. 단락과 단락 사이의 전환 또한 명쾌했다.

미국 대선에서는 중1처럼 말해야 승리할 수 있다. 두괄식을 구사하며 중문·복문·혼합문이 아니라 단문을 써야 한다. 박사과정 학생이나 교수처럼 말하기는 자멸의 길이다. 사고력이 세계적인 석학급인 후보라도 국민·유권자에게는 중1 학생 대하듯 편하게 말해야 한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대상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말했다. 전문가들과 토론할 때와 초등학생들에게 연설할 때가 달랐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또한 언어 능숙도의 카멜레온이었다.

우리 대선에서도 후보 간 토론이 본격 개막했다. 우리 언어문화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보다 말은 좀 어눌하게 해도 마음속과 능력이 꽉 찬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말이 유창하면 오히려 경계한다. 상대편 '말실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한 방에 '훅' 간다. 문법·어법상의 실수는 대체적으로 눈감아 준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 모든 언어의 평가 기준을 제시하는 미국외국어교육협의회(ACTFL) 국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언어의 능숙도가 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능숙도가 높다는 것은 준비하거나 연습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즉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유권자는 다음 대선에서 품격 있는 말로 세계의 거물들과 맞짱 뜰 수 있고 초등학생들과도 잘 소통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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