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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신경정신과 전문의 수잔 정 박사…나이듦, 그 즐거움을 말하다

연대의대 졸업 후 도미
신경정신과 전문의 취득

입대해 미군 병원서 근무
카이저병원서 33년 진료
가정상담소·교회 상담 등
한인사회 봉사도 열심
"쉰 넘어 비로소 나를 사랑
삶의 지혜도 함께 커져"


일흔의 여의사는 아름다웠다.

열정적이었고 솔직했고 다정다감하기까지 했다. 그녀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 절로 들게 하는 여자, 수잔 정(71)박사다. 대화 내내 그녀는 진지하게 경청했고 답변은 간결했다. 나이들 수록 남의 이야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한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줬다. 아픈 과거사를 건너오며 힘들었던 속내도 가감 없이 들려줬다. 그리하여 나이 들어가는 것이 꽤 괜찮을 수도 있음을 알게 해준 고희의 정신과 전문의와의 대화는 신선하고 즐거웠다.

#문학소녀, 의사가 되다



해방둥이인 그녀는 평양 인근 개천에서 태어나 돌 지나 서울로 왔다. 숙명여고 재학시절 이화여대가 주최한 전국문예콩쿠르에서 시조부문 1등과 희곡부문 가작을 동시 수상할 만큼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국문과에 진학해 희곡 작가를 꿈꿨다.

"고교시절 영국 수의사인 스코필드 박사가 선교사로 와 이끈 바이블 스터디에 참여했는데 박사님께서 하루는 저를 불러 가난한 나라를 일으키려면 의사가 많이 필요하다며 제게 의대 진학을 권유하셨어요. 저는 그때 콩쿠르 수상으로 이대 입학이 예정돼 있기도 했고 의대 학비를 댈 집안 형편도 안됐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그녀에게 후원가를 연결해 장학금을 주선해줬고 1964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의대 재학시절 만난 한 학번 위 동갑내기 선배와 4년 열애 끝 결혼한 그녀는 남편이 원주 통합병원 군의관으로 복무하게 돼 원주기독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이후 1973년 그녀는 5개월 된 첫딸을 친정에 맡기고 남편과 뉴욕으로 건너와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병원 정신과 레지던트로 취직했다.

"당시 외국인 의사가 취직하는 게 쉽지 않아 가장 빨리 취직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니 당시 의사 수가 턱 없이 모자랐던 정신과였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진료하면서 같은 병이라도 행복한 이들이 빨리 회복되는 걸 보면서 정신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이기도 했죠."

한국출신 여의사의 미국 병원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힘들었죠. 그러나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니 환자들도 마음을 열고 치료가 되는 걸 보면서 기쁘기도 했고 미국 와 위축됐던 자신감도 회복됐죠.(웃음)"

#한인사회를 위해 일하다

그렇게 쉽지 않은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도 1년 만에 연방의사 자격증을 땄고 그해 뉴올리언스 툴레인 의대 정신과 레지던트로 자리를 옮겼다. 그 대학 최초의 동양인 레지던트로 들어간 그녀는 일반 정신과와 소아 및 청소년 정신과 수련과정까지 거쳐 1980년 신경정신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미국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소아·청소년의 정신세계부터 이해해야 되겠다 싶어 좀 힘에 부쳐도 2년 더 수련 과정을 거쳤죠."

레지던트 과정을 모두 끝낸 1977년 그녀는 미 육군에 입대했다. 둘째 딸 카니(39·한인가정상담소 소장)씨를 출산하고 6주 만의 일이었다.

"남편이 장남이었는데 홀로 되신 시어머니 환갑을 꼭 직접 가 치러드리고 싶다 하더라고요. 미군에 입대하면 한국 주둔 미군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다 해서 남편과 동반 입대했죠."

용산 미군 병원에서 1년간 근무한 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워싱턴주 타코마시 소재 육군병원에서 소아정신과 과장으로 3년6개월간 근무했다. 그리고 1981년 제대 후 LA로 이주해 아시안 정신건강센터를 거쳐 84년 파노라마시티 소재 카이저병원 소아 및 청소년 정신과에서 근무했다. 그러면서 한인가정상담소 수퍼바이저를 비롯 한인청소년센터(KYC)에서 청소년 상담을 하는 등 본격적으로 한인사회 봉사활동도 시작했다. 특히 그녀는 92년 4·29 LA폭동이후 한인들의 정신건강을 염려해 출석교회에서 격주로 무료 상담을 시작해 25년째 이를 지속해 오고 있다.

#고난을 넘어 행복으로

LA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직장생활도, 한인사회 봉사활동도 그녀에게는 보람이었고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 모든 불행이 그러하듯 예고 없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1994년 여름,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조깅을 나간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남편의 나이 49세였다.

"건강했던 남편을 그렇게 갑작스레 보내고 나니 충격이 너무 컸죠. 침대에 일어나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당시 병원 일이 없었다면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낮 시간은 환자를 보며 슬픔을 잊을 수 있었지만 퇴근 후 남편이 없는 집으로 귀가하는 게 힘들었던 그녀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 등록해 야간 수업을 들었다. 강의를 들으러 가는 차안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단다.

"당시 신이 원망스러웠죠. 그래서 무작정 신학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고통 속에서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고 그녀는 남편과 지난 미국생활에 대해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죠.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8개월간 녹음을 했어요."

그녀의 이 녹음기록은 1997년 '아메리카를 훔친 여자'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이후 그녀는 한인 언론매체에 활발히 칼럼을 기고했고 이 칼럼들을 묶어 '튀는 아이, 열린 엄마' '문제아는 없다' 등 총 5권을 출판하기도 했다. 또 한인사회 우울증 관련 각종 세미나도 팔 걷어붙이고 앞장섰다. 이렇게 환자를 보고 글을 쓰고 2000년대 초반부터는 마라톤에도 입문하며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통과했다. 그리고 2007년 연대 의대 7년 선배인 외과전문의 김규환 박사와 재혼했다.

현재 그녀는 카이저 병원에서 1주일에 2차례씩 진료를 하고 있고 USC 의대에서 임상조교수로 레지던트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여전히 한인가정상담소와 교회 상담일도 꾸준히 하며 각종 세미나도 열심이다.

"쉰 넘으니 비로소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고 삶의 지혜도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즐거워요.(웃음) 누군가의 도움으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듯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도움을 주며 살아가야죠."

아름다운 삶이 그 어떤 책보다도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밤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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