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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민족학교 윤대중 회장 "이민 청소년에 희망주고 싶습니다"

고3때 시카고로 이민
한인단체 자원봉사 시작
마당집·NAKASEC 거쳐
98년 LA 민족학교 근무

서류미비자 대학입학 등
이민자 권익옹호 앞장
"저소득층 청소년 위한
교육기관 건립이 꿈"


그는 쾌활하고 따뜻했다.

언제나 청년일 것 같던 그의 얼굴에도 주름이 내려앉았고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곤 있지만 청춘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민족학교 윤대중(46) 회장이다. 지금껏 이민자 인권문제 및 권익옹호 등 무거운 주제와 함께 한 삶이었지만 그는 그 시간들을 꽤 유쾌하게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그리하여 그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고 따뜻했으며 리드미컬했다.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지내는 그를 LA민족학교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이민자 권익운동에 눈뜨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고3 때인 1988년 시카고로 가족이민 왔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10대 때 이민 온 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터프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너무 힘들었죠. 영어를 못하니 학교생활이 쉽지 않아 극심한 열등감에 시달렸고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돼 좌절감과 스트레스가 컸죠."

그러면서 주말엔 부모님이 운영하는 빨래방에 가 일손을 도왔다. 이처럼 고단하고 힘든 시기 그에게 위로와 용기가 돼 준 것은 한인교육문화원(현 한인교육문화 마당집)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저에게 조언과 용기를 주셨죠. 그분들의 진심어린 태도가 제게 큰 감동과 위안을 줬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자원봉사를 하게 됐죠."

낯설고 물선 타국 땅에서 처음 맛본 연대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미국 인권운동 역사와 한인 이민역사 등을 공부하면서 차츰 자신감도 회복해 갔다.

"인종차별에 온 몸으로 저항했던 흑인 인권운동을 공부하면서 정의가 무엇인지, 미국이 왜 멋진 나라인지를 알게 됐죠. 그러면서 저도 소수민족으로서, 이민자로서 자부심도 생기면서 자신감도 회복했던 것 같아요."

고교 졸업 후인 1992년 UIC(일리노이주립대 시카고)에 입학해 정치학을 공부하다 1학년을 마친 후 휴학하고 시카고 마당집 풀타임 상근자로 근무했다. 그러다 1996년 뉴욕 소재 마당집 자매단체에서 도움을 요청하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무보수 파트타임이었지만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결혼 1년차 가장이기도 했다.

"제가 좀 단순해요.(웃음) 같은 뜻을 가진 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저를 필요로 한다고 하니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죠. 당시 활동하며 만난 아내도 제 결정을 지지해줘 가능하기도 했고요."

#민족학교와 20년

뉴욕에서 그는 마당집 외에도 한인봉사단체협의회(NAKASEC) 전국본부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이민자들의 권익을 위해 눈썹 휘날리며 뛰어다녔다.

"당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이민자 인권옹호를 위해 싸우는 일이 정말 보람 있고 평생을 바쳐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1998년 LA 민족학교로 왔다. 당시만 해도 상근자 2~3명이 근무하는 작은 단체였다.

"LA는 미국 최대 한인 커뮤니티이기에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거라 생각해 이주를 했습니다. 이곳에 와 제일 처음 배운 게 무료 세금보고였어요. 그 외에도 각종 서류번역 등 영어가 불편한 한인들을 도와드렸는데 그러면서 한인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서비스나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배워나갈 수 있었죠."

1998년 사무국장에 취임한 그는 3년 뒤인 2001년 마치지 못한 학업을 위해 시카고로 돌아갔다 대학 졸업 후인 2003년 다시 LA 민족학교 사무국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2013년부터 2년간 NAKASEC 사무국장직을 수행한 걸 제외하고는 줄곧 민족학교 터줏대감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현재 그는 민족학교 회장과 NAKASEC 사무국장 직을 공동 수행하고 있다. 그가 민족학교와 인연을 맺은 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물으니 ▶2000년 가주 정부가 이민자 현금보조프로그램(CAPI)을 폐지하려하자 한인 200여명과 함께 주지사 사무실 비폭력 점거농성을 벌여 하루 만에 이를 철회시킨 것 ▶2008년 오렌지카운티 내 일부 커뮤니티 칼리지가 서류미비 한인 및 아시안 학생 150여명의 입학을 거부하자 나성법률보조재단 등 시민단체와 공동 항의해 입학허가를 받아 낸 것 ▶2011년 메디캘 관련 서류에 한국어 번역본 첨부 캠페인 성공 등을 꼽았다. 이외에도 2007년부터 시작해 난항 끝 지난해 완공된 저소득층 노인 아파트인 두레 아파트 건립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일들 중 무엇보다 도움을 줬던 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 교사, 변호사, 심리상담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인으로 자리 잡았다는 연락을 받을 때 보람을 느끼죠. 또 그 청년들이 민족학교 봉사자로 활동하는 걸 보면 더 뿌듯하고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20년 새 민족학교의 규모도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98년 첫 근무당시 2~3명이던 상근자는 20여명으로, 자원봉사자도 40여명에서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연예산도 130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살림살이가 커지면서 더 분주해졌지만 요즘 그는 그 어느 때 보다 정신없이 바쁘다. 바로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 때문이다.

"민족학교가 이민 관련해 한 달 평균 150여 통의 전화를 받는데 최근엔 두 배 늘어난 300여 통의 전화를 받을 정도죠.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 때문에 힘들어 하는 한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를 위해 민족학교가 이민단속반에 대처하는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하고 교회나 단체에 가 관련 교육도 실시중입니다."

이처럼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지만 여전히 그는 가야할 길이 멀다 말한다.

"언젠가 서류미비 학생들과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공부도 하고 직업교육 및 커뮤니티 봉사활동도 하면서 아이들이 기죽지 않고 꿈을 키울 수 있게 도와주고 싶거든요. 그렇게 미국사회를 이끌 리더들을 키우는 게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말했다. '날지 못한다면 뛰어라/뛰지 못한다면 걸어라/걷지 못한다면 기어라/당신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뛰기도 하고 때론 걷기도 하며 오늘에 이른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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