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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 가족과 집안끼리 친했다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43)
전쟁 영웅에서 커뮤니티 숨은 봉사자로, 김영옥(2)

아버지는 집에서 영어와 미국식
어머지는 한국어와 한국식 주장
일본의 식민지 수탈 듣고도 못믿어
고교 행사에서 정체성 위기 찾아와


1979년과 1980년 김영옥 대령과의 인터뷰를 통해 살펴본 그의 생애이다.

나의 부모는 LA다운타운 근처의 템플과 피겨로어 코너에서 조그만 식품상을 운영했다. 우리는 유대인, 일본계, 중국계, 멕시칸 이웃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서울에서 중매로 결혼했다. 나의 아버지는 인천 출신이고 어머니는 수원 출신이다. 독자인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했는데 장모와 문제가 많았다. 일제 강점기 시기였던 그때 장모와 문제가 많고 일본의 침략이 싫어 아버지는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와 사촌은 친한 친구로 지냈는데 함께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부산으로 도망했으나 잡혀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잡혔다. 그러나 세 번째 그들은 하와이로 무사히 올 수 있었다. 하와이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서 시애틀에 도착했으며 결국은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감리교 학교를 졸업했는데 1916년 선교사가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를 시키려고 미국으로 데리고 왔다. 선교사가 아버지에게 아내가 미국에 도착했다고 연락했는데 어머니는 남편에게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아내를 원한다고 하면서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선교사들이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남가주 지역에서 농업 노동자로 일하면서 처음 2년은 매우 고달픈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할리우드에서 하우스 보이 또는 호텔 보이로 일했다.

나는 1919년 1월 26일 LA에서 출생했다. 다른 한국인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미국에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저녁에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를 배워 제법 영어에 능통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집에서도 영어를 하라고 가르쳤고 미국 음식을 먹도록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집에서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국어를 사용했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한국 음식을 만들고 아버지와 자녀들을 위해 미국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어머니는 사업으로 자산을 증식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한국 교회를 다니도록 했으며 한국인들의 모임에도 참석하도록 했다. 나는 16세 또는 17세까지 한국 교회와 주일학교를 다녔다. 나는 한국어를 잘못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와 주일학교 생활은 나에게 무의미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한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파벌 싸움으로 한인 사회와 교회가 분열된 점이다.



이승만계의 동지회와 안창호계의 흥사단 회원들이 서로 다른 교회를 다녔다.

어떤 한인들은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버지는 평생 이승만을 지지한 몇 안 되는 분이다. 한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했지만 그들의 신앙심은 별로 깊지 않았고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나는 다른 아이들과 잘 지냈다. 그 당시는 백인과 소수계의 거주지가 완전히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본, 중국, 멕시칸, 이탈리안, 흑인의 대부분 소수계였다. 물론 백인도 조금은 있었다. 한국 학생은 나와 다른 학생 단 둘뿐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다른 일본계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식민지화하고 수탈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나에게 일본 학생들과는 절대로 놀지 말라고 주의도 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믿고 싶었지만 일본의 만행을 그 당시에는 믿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조금 과장하지 않았는가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일본 학생들과도 어울렸다. 아마 일본 학생들의 부모들이 한국인이 나와 어울리지 말라고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씨 집안과 안씨 집안 두 가정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특히 안창호 집안의 자녀들-필립, 랠프, 수전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대부분 소수계 학생들이 재학했으나 고등학교는 거의 절반이 백인 학생들이었다. 학교 행사와 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면서 나에게 정체성 위기가 찾아왔다. 영화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모두 백인이었다. 일본계와 중국계 부모들 역시 자신의 딸들이 나와 데이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스스로 질문했다. 나는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그 당시 나는 한국인 또는 미국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 대공황 때 나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많은 아시안들이 공산주의에 매료되고 있었는데 나도 회원으로 가입하라고 종용을 많이 받았다. 나도 칼 마르크스의 책을 세 번 읽었는데 내가 18세 때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우리 집은 두 명의 딸과 네 명의 아들이 있다. 나의 누나 윌라는 우리 집에서 부모님보다도 오히려 영향력이 있었다. 누나가 나에게 미국식 매너를 가르쳤고 모임에도 데리고 다녔다. 지금도 윌라의 말은 잘 듣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LA시티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나는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 혼자 스스로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았다. 우리 집에서 내가 아마 가장 독불장군이었다고 생각된다. 공부보다는 스포츠를 더 좋아했다.

나의 번호가 첫번째로 뽑혀서 1941년 1월 미군에 징집되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나는 한 달 반 있으면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군인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군인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불확실했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중대장이 나에게 장교 학교로 가라고 추천해주었다. 장교 훈련 학교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좋은 군인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군사작전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쉬웠다. 장교 학교는 일본계의 입학을 불허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일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중국계로 자주 오인되곤 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그게 뭔데?"

"중국계하고 비슷해"라고 답변하곤 했다.

장교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100대대로 보내졌다. 그 당시는 아시안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필리핀계로 구성된 부대도 따로 있었다. 내가 100대대에 부임하자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것을 잘 아는 패렌트 터너 대대장이 나를 다른 부대로 전근시켜주 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라며 그 부대에 남았다. 나의 부하는 약 40명이었는데 모두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 군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훈련시켜 유럽 전선에 함께 투입되었다.

100대대는 12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한국계는 두 명 있었다. 다른 한국계는 하와이 출신의 고존이었였다. 그는 하와이 대학교의 ROTC 출신으로 장교로 임관해 100대대에 부임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첫 전투에서 부상당해 부대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100대대가 유럽 전선에 투입된 지 9개월 후 442연대를 조직해 유럽 전선에 합류시켰다. 이미 존이 부대를 떠난 이후였고 100대대가 442연대 밑으로 합류할 때 내가 유일한 한국계로 남게 된 것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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