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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 스러져간 소아과 의사의 꿈

트럼프 ‘제조업 르네상스’ 첨병 남부 자동차산업 이면은…
블룸버그, 작년 6월 아진USA 여직원 사망사고 집중 조명

독서를 즐겼고 말과 강아지를 끔찍히 사랑했던 레지나 엘시아(20).

최근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가 미국 남동부 자동차업계의 가려진 이면을 소개하며 엘시아가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간 과정을 집중 조명해 눈길을 끌고 있다.

투스칼루사 인근에 메르세데츠-벤츠 조립공장이 들어선 1997년 그녀는 한 살이었다. 소아과 의사의 꿈을 가진 엘시아는 팰 그랜트 장학금을 받고 커뮤니티 컬리지에 등록했다. 나중에 어번 대학으로 편입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집이 있는 파이브 포인츠에선 30마일 떨어진 학교였다. 하지만 월마트에서 재고관리를 하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 엘시아는 돈을 벌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신접살림이랄 것도 없지만 작은 단칸방을 렌트하기 위해서였다.

엘시아는 지난해 2월 앨라배마주 쿠세타시에 있는 한국계 기업 아진USA에 입사했다. 현대와 기아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체다. 누이와 의붓아버지도 그곳에서 일했다. 엘시아의 어머니 앤젤 오글은 뜯어말렸다. 하지만 그녀의 뜻을 꺾을 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엘시아는 공장의 두 개의 다른 파트에서 근무하면서 참기힘든 압박을 받았다고 블룸버그는 설명했다.



스무살이 된 엘시아는 쉽게 단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딸아이가 첫 월급을 받아왔을 때 자긴 이제 부자라고 생각했었죠.” 어머니 오글씨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엘시아는 남자친구와 언약을 맺었다. 그래서 더욱 더 하루 12시간, 주7일 일하며 풀타임으로 채용될 것이란 꿈에 부풀었다고 한다. 시간당 8.75달러에서 10.50달러로 임금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에게 “대학은 기다리면 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6월 18일. 공장 조립라인에 문제가 생겼다. 23호기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컴퓨터가 이상을 알렸을 때 엘시아는 주간 근무조로 편성돼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기 옆에 있었다. 함께 일하던 이들이 점검을 요청했지만 아직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직업안전위생관리국(OSHA)이 입수, 분석한 영상에 따르면 엘시아와 다른 3명의 조원들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들에겐 하루 420개의 대쉬보드가 할당됐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350개를 넘기기 힘들었다는 전언이다. 엘시아와 함께 일한 조원 앰버 메도우(23)의 말이다. “항상 할당량을 맞추려고 했어요. 그래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요.” 조원들은 언제나 피곤에 찌들어있었다는 말도 그는 덧붙였다.

몇 분 뒤 엘시아는 공구 하나를 집어들었다. 영상에 따르면 스크루드라이버처럼 보였다. 그리곤 화면에 잡히지 않는 로봇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스스로 점검을 하려는 듯 했다. 엘시아가 무엇을 했든, 그 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부숴졌다. 자동 용접기의 날카로운 끝이 그녀의 상체를 향했기 때문이다. 한 동료가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엘시아는 기계에 갇혔다. 웅크린 채 눈은 뜨고 있었고 의식이 있었지만 말은 없었다. 그녀를 빼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그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조장은 황급히 포크리프트에 올라 휴게실로 내달렸고 유지보수 기술자를 태워 서둘러 사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른 라인에서 일해온 기술자로서도 달리 묘수가 없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조원들은 모두 분노했고 기술자를 밀쳤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그는 한국인이고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다고 한다. 메도우씨는 그가 조원들과 다툰 뒤 자리를 떴다고 말한 것으로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또 다시 몇 분이 지난 뒤 비상대응팀이 현장에 다다랐다. 엘시아는 여전히 갇혀있었다. 그들은 동력을 끊었다. 어떤 기계도 더이상 작동할 수 없도록 했다.

OSHA에 따르면 사측은 연방법이 규정하고 있는 안전 시건장치(safety lock)의 사용법을 근로자들에게 알리거나 트레이닝한 적이 없었다. 아진USA는 오샤측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항변하고 있다.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간 그녀는 다시 헬기에 올라 버밍햄의 의료센터로 옮겨졌다. 이튿날 그녀는 숨을 거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유족인 엘시아의 어머니는 아직도 아진의 대표와 고위 경영진으로부터 어떤 말도 듣질 못했다고 한다. 장례식에 인조 화한 한 그루만 보냈다는 것이다.

앨라배마는 ‘뉴 디트로이트’라는 닉네임으로 통한다. 자동차 산업 종사자만 2만6000명이다. 작년 한 해 전체 임직원의 임금 총액은 13억달러에 달했다. 인접한 조지아와 미시시피주도 자동차산업 비중이 높기는 마찬가지다.

한때 활황을 이끌었던 섬유산업이 오랜 침체에 빠진 이후로 자동차 산업은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하는 ‘제조업 르네상스’를 이끌 첨병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남부는 멕시코와 아시아에 비해 마진율이 낮아 문제들이 발생한다.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생산 스케줄을 약속하다 기일을 어기면 그에 따른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근로자들은 한달 내내 주 6, 7일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을 일한다. 급여는 적고 이직률은 높으며 트레이닝은 태부족이다. 안전은 후순위이며 누군가 다쳐야 개선하는 ‘사후약방문’ 식이다. 아시아 전역에 걸친 원청 제조업체의 전형적인 작업장 근로 환경의 비통함이 현재 미국 남부의 부품 공장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게 블룸버그의 해석이다.

데이빗 마이클스 OSHA 국장은 “부품공급업체가 방글라데시로 가는 게 아니다. 앨라배마와 조지아로 향하고 있다”며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블룸버그가 정보공개법에 의거, 입수한 OSHA의 2010년 자료에 따르면 앨라배마 자동차업계 근로자들의 부상과 질병은 미국 전체의 평균보다 50% 더 많다. 이 차이는 최근 들어 감소하고 있지만 정신적 외상은 미시간보다 9%, 오하이오 보다는 8% 높은 수준이다. 2015년 앨라배마 자동차업계의 손가락과 팔 절단사고율은 전국의 일반 작업장 사고율의 두 배 수준이며, 미시간보다 65%, 오하이오보다는 33%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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