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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카페] “뒤늦게 빠진 사랑, 시는 내 운명”

‘문학 청년기’ 맞은 용촌 오영근 시인

“저에게 시는 운명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면 운명이라 표현할까. 올해로 등단 14년, 내년을 기약하며 벌써 다섯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오영근(사진) 시인의 문학 청춘기를 만나봤다.

오 시인의 명함에는 큼직하게 박쥐 모양이 새겨져 있고, 전자메일 주소는 배트맨 오(batmanoh)다. 게다가 첫 시도 ‘흡혈박쥐의 장송곡’, 시인으로 등단한 계기 역시 이 시라고 하니 문득 시인과 박쥐의 관계부터 호기심이 닿는다.

오 시인은 “원래 전공은 생물학이고, 박쥐가 전공입니다.” 다소 차가운 느낌의 ‘박쥐’와 따스한 느낌의 ‘시인’. 참으로 대비되는 조화라는 생각이 스치던 찰나, 오 시인이 덧붙인다. “그런데 시가 뭔지 알기 위해 시인이 됐습니다. 시를 그냥 읽고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시를 더 깊이 알고 싶고 알수록 또 더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게 바로 운명 아닌가요?”

오 시인은 자신의 삶에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늦둥이’고 시는 ‘늦바람’이라고 말한다. 2003년, 나이 일흔을 목전에 두고 등단해 2년마다 내리 네 권의 시집을 발간했으니 늦바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싶다. 특히 첫 번째 시집에서는 갓 태어난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은 듯 시집이 소설책 두께만 하다.



오 시인은 “시라는 본질에 대해 내가 고민하는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 이렇게 세 언어로 쓰다 보니 두꺼워졌다”며 “특히 내 시 안에는 우리나라의 정서는 물론 일부 역사적 사건도 함께 쓰여 있어 이민 2세나 3세대가 같이 읽고 한국에 관심을 놓지 않는 계기가 된다면 더 없이 바랄 게 없다”고 묵혀둔 포부도 살짝 전한다.

네 권의 시집은 모두 ‘시(詩)’라는 말로 시작된다. 1집은 <시는(2004)> , 2집은 <시는 사랑(2006)> , 3집은 <시는 믿음(2008)> , 4집은 <시는 소망(2010)> 이다. 오 시인은 “시라는 말 자체가 좋지 않나요? 한자 시(詩)를 떼어 보면 말씀 언(言)에 마을 사(寺), 말씀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잖아요. 인생 늦깎이에 그 말 안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라며 이내 문학 소년의 감성을 드러낸다.

시집 네 권을 막상 펼쳐보니 시집마다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생물학 박사로 40여 년의 교단생활을 막 끝내고 퇴직한 2000년, 처음 시인의 이름으로 낸 1집 처녀시집에서는 시들의 제목이 ‘해부학 교실, 장기기증자, 지렁이 아가씨’ 등 생물학 강의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2집은 금세 사랑이라는 제목답게 ‘아내와 그녀, 첫 입맞춤’ 등 사랑 젖은 감성이 흠뻑 묻어있다. 물론 중간중간 ‘나의 사랑하는 박쥐에게’ 등 생물학적 발상은 여전하다.

한편 3집 믿음은 ‘눈 감고 기도하면, 십자가 목걸이’ 등 시인의 신앙적 감흥이 깊이 묻어나는 시들로 가득 찼다. 오 시인은 “세상에서 첫 번째 시인은 하나님”이라며 “하나님이 표현하신 세상은 끝이 없고 무궁무진하기에, 나는 하나님이 표현하신 것들을 겨우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발 물러선다. 네 번째 시집 소망은 시인의 다소 고조된 감성이 엿보인다.

‘소금이고 싶다, 대통령을 찾습니다, 남북한 대학생에게 고함’ 등 인간과 자연에 관한 소망에서부터 평화통일과 사회정의를 담은 시가 곳곳에 화살처럼 박혀있다. 오 시인은 “사실 내가 처음 시를 쓰게 된 계기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며 울분을 글로 쏟아낸 것”이라며 “때로는 내가 소망하는 삶을 위해 부조리한 현실을 질타하는 시도 거침없이 쓴다”고 고백한다.

여든셋의 오영근 시인. 8년 만에 5번째 시집을 준비하는 오 시인의 다음 시집 제목은 또 ‘시는 OO’ 일까? 오 시인은 “글쎄요,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시는…….” 이런저런 단어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 시인이 입을 연다. “시는 천국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다가 천국에 가서, 만약 천국에서도 시 모임이 있다면 시 모임을 나가고 싶고 시를 쓰고 싶어요. 비록 늦게 사랑한 죄는 있지만 그럼에도 시는 내 운명이에요.”

‘오영근, 길 영, 뿌리 근’. 시인의 이름처럼 이 땅에서 길게 뿌리 내린 시인의 싱그러운 문학 열정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훗날, 천국까지 또다시 길게 뿌리 내리기를 응원하며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을 벌써부터 기다려본다.







영원한 시인

뿌린 씨앗이
지하의 젖을 빨아 먹고
두꺼운 대지를 뚫고
힘차게 돋아나오는
믿음을 아십니까?

햇볕으로 펄펄 달구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온갖 지구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랑을 아십니까?

때가 되면 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낙엽을 흔들어 깨워
대지 위에 흩뿌리는
소망을 아십니까?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라면,
영혼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의 운명입니다.

(후략)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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