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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가수 박재란, '산 너머 남촌…'을 부른 만인의 연인

60년대 최정상 스타 가수
73년 도미… 타운서 노래
이혼·생활고 신앙으로 극복
간증집회 열며 '인생 2막'
8년 새 두 차례 대수술
가수 딸 심장마비로 잃기도
최근 TV출연…인기 재점화
상반기 새 앨범 발표 계획


여든 해쯤 살다보면 미간에 혜안(慧眼) 하나쯤은 훈장처럼 반짝이려나. 문득 돌아본 지난 발자국 갈지(之)자 선명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려나. 그러나 아직 그 시간에 가 닿지 않은 이들에게 생은 여전히 비밀투성이이며 진부한 농담일 뿐. 그리하여 '인생은 아름답다'는 오래된 명제는 젊은 비관론자들에겐 그저 빛바랜 낭만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평탄치 않은 결혼사와 생사를 넘나든 두 차례의 대수술, 그리고 딸의 사망까지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고희의 여가수가 전하는 '인생은 아름다워' 라면 믿어봄직 하지 않을까. 바로 6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디바 박재란(76)씨다. 간증집회 차 LA를 방문한 그녀를 햇살 좋은 오후에 만나봤다.

#삼천만의 연인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어려서부터 빛을 발했다. 중학생 때 이미 노래실력 하나로 천안 일대를 주름잡던 그녀의 재능을 눈 여겨 본 작곡가 박태준씨가 그녀를 육군본부 산하 군예대(KAS)에 추천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군예대 시절 첫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못 얻다 1961년 발표한 '럭키 모닝'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님' '산 너머 남촌에는' '푸른 날개' '맹꽁이 타령' '진주조개 잡이'까지 연달아 히트시키며 그녀는 명실상부 1960년대 한국 가요계의 디바로 등극했다. 또 빼어난 미모로 195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천생연분'(1961) 등에도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도 다졌다. 이처럼 가요계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며 '삼천만의 연인'이라 불리던 그녀는 동갑내기 대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스타 가수와 대학생의 사랑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이들은 1966년 결혼 후 후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녀는 그곳에서 2년여 간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돈도 있고 사랑도 있었던 시절이었죠.(웃음)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사랑만으로 좋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행복도 잠시,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왔다. 빚을 갚기 위해 그녀는 쇼단을 꾸려 전국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후암동 저택을 팔고 전셋집을 전전하게 되었고 부부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부부는 이혼했고 1973년 그녀는 홀로 LA에 왔다.

#고단한 LA살이

LA에 온 그녀는 LA한인타운 8가길에 있던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를 부르며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이민국 단속반에 걸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기도 하고 사기까지 당하는 등 갖은 풍파를 겪었다. 타향살이 외로움에 지쳐갈 무렵 그녀는 열 살 연하인 한인 남성과 1975년 재혼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그리 길지 않았다. 재혼 후 5년 만에 파경에 이른 것이다.

"이미 한차례 이혼을 했기에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잘 안됐어요. 당시 한국사회에서 이혼은 특히 여성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에 두 번째 결혼 실패 후엔 죽을 만큼 괴로웠죠."

결혼 2년도 안 돼 별거에 들어가면서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왔고 악성 위궤양으로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 아파트 화재로 그녀는 전 재산을 다 잃었다.

"당시 자살 직전까지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나락에서 저를 구한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변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서 삶을 긍정하고 기쁘게 살게 됐죠. 그러면서 간증집회 요청이 쇄도했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그녀는 LA는 물론 뉴욕, 시카고, 알래스카 등 미국 전역을 돌며 간증집회를 열었고 찬양 앨범도 3집까지 발매했다.

#전설의 디바, 다시 무대로

1990년대 중반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녀는 지금까지 2000여 교회를 다니며 간증집회를 이어갔다. 이혼 후 어느새 강산이 네 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재혼할 생각은 없었냐는 질문에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재혼은 무슨…현모양처로 사는 게 꿈이었지만 결국 가정을 지키지 못했잖아요. 두 번의 실패 후 결혼이 겁도 났고… 나 좋다는 남자도 없었고. (웃음)"

롤러코스터 같던 젊은 날이 지나가고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는 듯 했으나 그 고요한 바다에 다시 풍랑이 일었다. 8년 전 심장수술을 비롯 5년 전엔 위종양이 발견돼 위절제술까지 받으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 된 것. 설상가상 2014년엔 둘째 딸 가수 박성신씨가 지병인 심장마비로 4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성신이가 팔삭둥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어요. 가수가 되겠다고 할 때 죽어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제가 가수가 돼 제대로 가정을 지키지 못한 탓에 불행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성신씨의 사망 후 그녀는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기도로 아픔을 달랬다. "이 세상에 오래 못산 건 아쉽죠. 그러나 천국에 갔을 거라는 확신이 들고나니 평화가 찾아오더군요. 인명은 하나님께 달린 거니까요."

현재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고 가수로서 활동도 재개했다. 지난 연말 주현미, 혜은이, 정훈희 등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던 후배가수들과 KBS '가요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지난 1월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시니어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리고 지난달 25일 KBS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편에 전설로 초대 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현재 그녀는 상반기 중 앨범 발표를 목표로 노래 연습에 여념이 없다.

"정말 세월 빨라요.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인생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살아보니 행복은 조건이나 상황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미리 삶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1960년 발표한 '푸른 날개'를 통해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다. '가슴을 털어놓고 노래합시다/ 하늘은 푸르고 마음도 즐거워/(중략)/날마다 괴로운 시름에 닥쳐도/가슴을 털어놓고 위로합시다/산 너머 산이요 강 건너 강이요/젊음의 푸른 날개여'라고.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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