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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이준수 목사 "장애는 축복…내 삶이 그 증거"

뇌성마비지만 지적장애 없어
학창시절 성적 늘 최상위권
서강대 졸업 후 UCLA 유학
박사학위 좌절 후 신학 공부
한인 첫 뇌성마비 목사 돼
09년부터 홍보·문서 사역
"절망처럼 보이는 고난도
분명한 목적 있는 은혜"


살다보면 아주 특별한 영혼과 마주칠 때가 있다. 기다렸다는 듯, 선물처럼.

이준수(48)목사가 그러했다. 처음엔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의 말을 절반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신기하게도 금세 그 어눌한 말투에 익숙해지면 영혼을 잡아끄는 그의 특별한 성품에 반하게 된다. 아마도 이는 교육에 의해 습득됐다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그의 온유한 성품과 상대에게 어떻게 보여야겠다는 전의(戰意)랄까 허세 같은 게 전혀 없는 특유의 기품 때문이지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함으로 포장된 뻔한 역경 극복 스토리가 아닌 여전히 넘어지나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며 이 또한 은혜라 말하는 연약한, 그러나 용기 있는 한 인간의 내밀한 삶의 틈새를 보여줬다. 그 틈새 너무 눈부셔 눈가가 시렸다.

#뇌성마비 장애인, 명문대생 되다



2남1녀 중 장남인 그는 8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나 두 달간 인큐베이터에 있으며 심한 황달을 앓아 뇌성마비 장애인이 됐다. 그러나 몸이 불편한 것 빼고는 지적장애가 없었던 그는 강남 8학군 소재 고등학교에서 내신 1등급을 받을 만큼 학창시절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고 온화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그러나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불편한 몸이 창피하기도 했을 듯싶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제게 몸이 불편해도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셨죠. 그런 어머니의 교육철학과 사랑 덕분에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과 사귀며 장애로 인한 콤플렉스 없이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 어머니는 그에게 세상을 향해 난 희망의 통로였다. 모친은 초등학교 시절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를 업고 등하교시켰고 장애인 전형이 없던 그 시절 그가 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던 것도 모친의 애끓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당시 대입 학력고사 답안은 OMR카드에 작성해야 했는데 그의 떨리는 손 때문에 정확한 마킹이 불가능했기에 모친은 대학교들을 찾아다니며 그가 시험지에 답을 체크하면 학교 측이 이를 카드로 옮겨 달라 부탁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다 서강대 측이 이를 받아들여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돼 1988년 서강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여느 청춘처럼 연애도 하고 이별의 아픔도 맛본 평범하지만 눈부신 시절이었다.

#소울 메이트를 만나다

어려서부터 대학 강단에 서는 게 꿈이었던 그는 1993년 UCLA 대학원으로 유학 와 유럽사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평생 처음 어머니와 떨어져 홀로서기를 시작한 유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고군분투 끝 4년 뒤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박사과정을 거치며 그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문현정(44) 사모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그녀가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막 끝냈을 무렵인 1999년 겨울, 컴퓨터 통신을 통해 만난 이 청춘남녀는 불문학을 매개로 급속도로 친해졌다. 전공이 같다는 것 외에도 이들은 맛집, 책, 영화 이야기 등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며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상대에게 운명 같은 끌림을 느꼈던 듯싶다. 그리고 한 달 후 사랑에 빠진 청년은 태평양을 건너 서울의 한 카페에서 영혼의 반쪽과 마주 앉았다. 서울에 오기 전 그가 장애인임을 말했지만 문 사모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인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 약속 장소에 나갔죠.(웃음) 처음 만난 날 남편은 한국 남자들에게선 보기 드문 국가대표급 매너를 보여줬죠.(웃음) 만난 첫날부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던 것 같아요"(문현정 사모)

그가 서울에 머문 3주간 만남을 이어가며 점차 문 사모는 '저런 인품의 소유자라면 내가 평생 휠체어 끌고 살아도 좋겠다'는 결심을 했단다. 그리고 2000년 여름 그가 프로포즈를 했고 그해 가을 이들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2007년 쌍둥이 남매 조애나(10)와 브라이언(10)이 태어났다.

#고난과 동행하는 법

결혼 후 그는 박사과정은 수료했지만 논문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그의 오랜 꿈이 좌절 되는 순간이었다.

"제 인생 처음으로 맛 본 커다란 좌절이었죠.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 지금껏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죠. 그러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2009년엔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인 첫 뇌성마비 목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현재 그는 남가주밀알선교단에서 영성문화선교 및 홍보문서 담당 목회자로 사역 중이다. 미주 전역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소식지는 물론 선교단의 모든 홍보 문서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물론 그에게 컴퓨터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뒤틀리는 몸을 고정하기 위해 왼손으로 목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로만 타이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레터 용지 한 장을 쓰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문서선교 외에도 그는 기회가 닿으면 미국 내 한인교회 초청으로 설교도 해오고 있는데 설교 시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교문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설교가 어느새 150여 차례를 넘겼다. 그에게 물었다. 남들에겐 너무나 쉽고 평범한 쓰고 말하는 것조차 버거운 장애인인 게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왜 없었겠어요. 가끔 장애가 없었다면 사역을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러나 제가 장애인이기에 장애인들을 잘 이해하며 사역을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축복이라는 걸 깨닫게 돼요."

그리하여 그는 말한다.

"환경은 변하지 않아요. 관점이 변해야 상황도 변하죠. 고난 역시 지금 당장은 절망처럼 보이지만 그 길에 분명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에 언젠간 그 고난도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제 삶이 그 증거이니까요."

장애가, 고난이 축복이라 말하는 이 남자, 그러나 그 역시 때론 넘어지고 낙담도 한다는 고백 앞에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존재만으로 위로와 용기를 건넬 수 있는 삶이라니. 소심하게 움츠러든 어깨가 맥락없이 펴지는 순간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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