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흑백차별에 반기 들었던 전설의 복서…무하마드 알리 센터(Muhammad Ali Center)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평화·평등 정신 기리기 위해 건립
알리의 경기 영상 등 각종 자료 전시

60년대 후반 서울은 도심에도 흑백TV마저 대중화되지 않았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중계가 있는 날이면 TV가 있는 집에 영락없이 많은 동네 주민이 모여 공동관람하던 추억이 생각난다. "나비 처럼 날아 벌 같이 쏘다." 헤비급이면서도 사뿐 사뿐 날듯이 상대방 선수를 맴돌며 기회가 생기면 빠른 주먹을 벌같이 쏘아대던 그의 명경기에 모두 매혹됐다.

변칙적인 그의 권투 스타일은 시대를 앞서가는 창조적인 것이었다.

"좋은 답이 생각나지 않으면 침묵이 금이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허풍이 아니다" "내가 인식할 수 있고 내 마음이 믿는다면 나는 그걸 달성할 수 있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날개도 없다" "인기가 많으면 겸손하기 힘들다" 등 수많은 명언을 만들어낸 알리. 속사포 같은 주먹처럼 그의 입담은 '떠벌이 알리'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그는 흑인 인권을 비롯한 여러 사회문제 를 거침없이 비판했고, 그 속에 명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알리는 1942년 인종차별이 심하던 캔터키주 루이빌(Louisville)에서 태어났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받았다.

고향으로 금의환향했지만 식당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자 국가대표로 따온 금메달이 인종차별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며 금메달을 고향의 오하이오강에 던졌다.

1964년 2월 헤비급 챔피언이 됐고 흑인민권운동가 맬콤 엑스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본명인 노예시절 백인 주인의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를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이런 의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당국은 그에게 월남 참전 징집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알리는 "나는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들을 '검둥이'라고 욕한 적이 없다. 흑인의 인권마저 보장해주지 않는 미국이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느냐"며 징집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자격정지 선수가 되어 3년 5개월간의 법정 투쟁 끝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78년 36세에 은퇴한 알리는 1984년 파킨슨병을 진단받았고, 이후 투병하면서도 여전히 사회활동을 쉬지 않았다. 2005년 11월에 고향 켄터키 루이빌에 평화와 평등을 위해 '무하마드 알리 센터'를 개관하고 전세계 굶주리는 가난한 이웃들 위해 동분서주 봉사했다.

알리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국인이다. 무하마드 알리는 위대하다.

알리 센터를 방문했을 때 마침 인종간의 갈등 해소와 이해를 위한 'RACE'전을 하고 있었다. 알리는 지난해 7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