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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유재건 변호사 "평화·인권은 내 인생의 영원한 모토"

사형수 이철수 구명 앞장
10년 만에 석방 이끌어내
한국서 시사토론 MC 활약
96년 정계입문 3선 국회의원

미국통·외교통으로 명성
2008년 정계은퇴 선언
페퍼다인대 교환교수 부임
"귀국 후 후학 양성하고파"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별명은 영국신사였다. 그랬다. 그는 부드러운 화술과 타고난 친화력으로 처음 만나는 이도 금세 무장해제 시키는 묘한 재주랄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재건(79) 변호사다. 국회의원 시절 스포트라이트를 뜨겁게 받았던 스타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주는 어쩔 수 없는 선입견과 달리 그는 솔직 담백했으며 여전히 크고 작은 세상사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청년 같은 면모를 보여줬다. 올초 페퍼다인 대학교 교환교수로 부임한 유재건 변호사를 LA한인타운에서 만나봤다.

#신문팔이 소년, 인권 변호사 되다

1937년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당시 기자였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소년가장이 됐다. 외아들인 그는 생계를 위해 새벽엔 신문배달을, 밤이면 모친이 만든 색색의 찹쌀떡을 팔러 다녔다. 어려서부터 영민했던 이 수재소년은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경기중·고를 거쳐 1956년 연세대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이는 당시 연세대가 주최한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학교 측이 그에게 전액장학생으로 정치외교학과 특차입학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대학졸업 후엔 대학원에 진학해 정치외교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공군장교로 4년간 복무했다. 이후 한국 유네스코위원회에서 3년간 근무하다 결혼 후인 1969년 대학시절부터 꿈꿔왔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2년 뒤 석사학위를 받고 워싱턴주립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 중이던 이 평범한 유학생이 훗날 변호사가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다.



"당시 이민국에서 어머니의 비자연장을 거부하며 강제출국 시키겠다는 연락을 받았죠. 그래서 제가 직접 이민국 추방재판에 참석해 이를 변호했더니 담당판사가 변호사 자질이 충분하다며 법대에 가 변호사가 되라고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다음날로 박사공부를 접고 1974년 UC데이비스 법대에 입학했다.

#시사토론 MC에서 국회의원으로

그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철수 사건'이다. 1977년 신문기사를 통해 사형수 이철수(당시 25세) 사건을 알게 된 그는 이철수를 찾아가 도움을 자청했다. 이후 사건기록을 검토하며 그가 살인누명을 썼음을 확신하고 이철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달걀로 바위치기에 다름없는 지난한 싸움이었지만 구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7년 뒤인 1983년 이철수는 10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고 석방됐다. 이후 이 재판은 법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소수인종 인권 변호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 7년간 아내가 생계를 책임졌고 저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이었죠. 그러나 분명 정의는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힘겨운 싸움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힘겨운 구명운동 와중에 치른 변호사 시험은 그에게 숱한 좌절을 안겨줬다. 5년여에 걸쳐 9차례나 낙방한 것이다. 그러나 1982년 9전10기 끝 합격해 이철수 무죄선고 당시엔 당당히 변호사로 법정에 설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아내와 2남1녀 자녀들과 함께 LA로 이주, 윌셔가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이민법 세미나 개최 및 무료법률상담 등 힘들고 어려운 한인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그런 그가 한국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변호사로서가 아닌 TV시사토론 진행자로서다. 1990년 봄 재미 한인인권 문제 세미나에서 그의 뛰어난 발표실력을 눈 여겨봤던 방송기자들의 추천으로 MBC 시사토론 제작진이 그에게 MC 제안을 해온 것이다. 이후 그는 3년 반 동안 프로그램을 이끌며 세련된 진행으로 호평 받았고 KBS 심야토론 MC로도 2년간 활약했다. 그러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무렵 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에게 직접 연락을 해와 정계입문을 제안했다. 오랜 고민 끝 부총재직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96년 자신이 나고 자란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그곳은 현역 3선 의원의 텃밭이라 승리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루 5000명과 악수하기'와 같은 진정성 있는 캠페인으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성북구에서 내리 3선을 기록했다.

#스타 정치인에서 법학자로

그는 킹메이커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1997년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특보단장을 맡아 당선에 기여했다. 국회의원 재임시절 그는 한미의원외교협의회의 회장, 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간판 외교통·미국통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후반부에 들어서며 그는 당내 중도 보수모임인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을 결성해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 당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자유선진당 창당멤버로 입당했다.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표적 스타 정치인이었던 그의 탈당은 파격행보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민주신당 내 급진적 개혁세력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데다 중학교 선배인 이회창 총재의 창당을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에 입당을 결심했죠. 그러나 그곳 역시 내 정치적 신념과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창당 전당대회만 치러주고 나온 셈이 됐죠. "탈당 후 그는 총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내 나이가 72세였는데 그쯤에서 그만 하는 게 맞다 판단했습니다. 물론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 정치에 대한 염증과 실망감이 컸기도 했고요."

2008년 정계은퇴 후 그는 국제법률회사 상임고문을 거쳐 CGN TV 대표를 역임했다. 그리고 올초 페퍼다인 대학교 교환교수로 와 분쟁해결연구소에서 분쟁과 중재에 관한 법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여생도 평화·인권·복지를 위해 헌신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귀국 후 법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의 뜻있는 젊은 법학도들을 정의롭고 청렴한 지도자로 키워내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에게 물었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이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돌아온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한미 양국 모두 복잡다단한 정치사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는 오늘, 노(老)법학자의 이 짧은 말 한마디는 꽤나 묵직한 울림을 던져줬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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