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마당] 인간의 본색
서효원·여행가
그러나 본색이 드러날 때가 있다. 방어벽이 무너졌을 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술 취했을 때와 노름할 때다. 술 취하면 물리적인 벽이 무너져 버리고 노름을 하게 되면 돈을 잃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능이 드러난다.
집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착하다. 그러나 명절날 식구가 모여서 노름할 때 화투짝을 슬쩍 바꾸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79세인 나는 지금도 고스톱을 칠 줄 모르기 때문에 옆에서 얼마든지 노름꾼의 동태를 살펴볼 수가 있다.
맥아더 공원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나는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특히 한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자칫 핀잔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인 할머니는 여러 번 얼굴을 대해서 친숙하게 됐기 때문에 핀잔 걱정 안 하고 물었다.
"지금 연세가 얼마나 되었어요?" "내일모레면 100이에요." 한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한 마디를 덧붙인다. "곧 죽어야 할 텐데."
시간이 더 흘러서 할머니와 더 친해졌다. "할머니, 깡통도 잘 줍고 잘 걸으시네요?" "그래야 오래 살지요." 할머니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내가 "150세까지 사세요"라고 했더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미소 짓는다. 할머니의 얼굴은 젊은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워졌다. 그러고 보면 본색을 드러내는 게 꼭 나쁜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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