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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장기열 박사 "한인사회와 함께한 반세기 행복했습니다"

LA한인타운 초석 다진
故 소니아 석 여사 장남
LA 최초 한인1세 치과의사
한인 첫 치과의면허 시험관
상의·치과협 회장 등 역임
70~80년대 타운 발전 주도
3월 46년 의사생활 마침표
"욕심 없이 여생 보내고파"


처음엔 얘기 거리가 되겠냐며 인터뷰를 저어하던 그였지만 막상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니 여동생 손 붙들고 38선 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LA한인타운 초창기 모습까지 그 시간을 살지 못한 이들에겐 그저 신기하기만 한 옛날이야기를 한보따리 풀어놨다. 지난 3월 말 46년간의 치과의사 생활을 접고 은퇴한 장기열(80) 박사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 넘어 신산한 이민역사의 한 페이지를 치열하게 살아온 그를 만나봤다.

#만석꾼 장남에서 '투잡' 이민자로

그는 1936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만석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1996년 작고한 소니아 석 여사다. 석 여사는 LA한인회의 전신인 한인거류민회 회장 등 타운 60여개 단체장을 역임하며 LA한인타운 형성에 초석을 다진 이로 17세 때 조선 여성 택시운전사 2호로 기록될 만큼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여장부였다. 석 여사는 남매를 낳고 얼마 후 남편과 헤어진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1944년 귀국해 자동차 부품회사와 영화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후 석 여사는 북한에 있던 남매를 서울로 데려왔지만 194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면서 그는 학창시절을 이모 집에서 보내야 했다. 부유한 이모들 덕분에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1955년 서울 치대에 입학했다.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1963년 모친이 있는 LA로 온 그는 도미 첫해 뉴욕에 갔다 유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 1년 뒤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LA한인타운에 신혼살림을 차린 그는 치과기공소에서 일했지만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위해 퇴근 후엔 UPS에서 택배를 싣고 내리는 작업을 했다. 자정이 다돼 퇴근하고 오전 5시면 출근하는 고단한 생활이 3년간 지속됐다. 이후 외국인 치과의사들의 치과대학 편입 규정이 완화되면서 그는 1968년 로마린다 치대에 편입했다.

#LA 첫 한인1세 치과전문의

1971년 치대 졸업 후 그는 LA한인타운 윌셔 길에 치과를 오픈했다. LA 한인 1세로는 첫 치과전문의였다. 당시엔 가주치과협회가 치과병원의 광고를 엄격히 금하고 있던 시절이라 개원을 알릴 길이 딱히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환자들은 늘어갔다. 환자가 많은 날엔 하루에 50~60명이 몰려들었을 정도다.

"당시 한인 환자들은 지상사 주재원이거나 한국에서 파견 온 공무원들 정도였죠. 그러다보니 환자들의 70%는 타인종들이었습니다."

윌셔가에서 3년간 치과를 운영하던 그는 1974년 올림픽가로 치과를 이전해 43년간 그곳에서 환자를 봤다. 당시 주유소가 있던 치과 자리는 모친의 권유로 구입했다 은행융자를 받아 건물을 올린 것이라고. 치과는 환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당시엔 치과가 많지 않아 잘될 수밖에 없었어요.(웃음) 애초에 치과로 큰돈 벌겠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지금껏 남의 신세지지 않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큰 고생하지 않고 살아 온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그 짧지 않은 세월을 치과의사로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환자들 덕분이란다.

"오래 치과를 하다 보니 3대가 오는 환자들도 생기고 오며가며 커피며 도넛을 놓고 가는 이들도 있을 만큼 환자들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냈죠. 덕분에 그 긴 시간을 치과의사로 지루할 틈 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77년 그는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가주 치과의면허시험 시험관이 돼 15년간 치과의면허 실습시험을 감독했다. 또 한인사회 봉사에도 앞장섰다. 1973년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필두로 코리아타운번영회 이사장(1976~77년), 남가주상공회의소 회장(1979~81년), 서울올림픽후원회 부회장(1987년) 등을 역임하며 70~80년대 한인타운 발전을 주도해 왔다. 분명 성공한 이민생활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회환이랄까 후회도 있을 듯해 물으니 그가 고민하다 내민 대답이 재밌다.

"미국 와 얼마 안 돼 무역업을 하는 한국 고교동창이 가발을 팔아보라 권유해 이를 좀 받아 가게마다 다니며 팔아보려 했는데 사려는 이들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다 버렸죠. 그런데 2년쯤 뒤 한국산 가발이 대히트를 쳤어요. 조금만 늦게 시작했으면 대박 났을 텐데 말이죠.(웃음)"

엉뚱한 듯 허를 찌르는 답변이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을 엿보게 했다.

#50년 일터를 떠나다

그는 워커홀릭이다. 개원 후 첫 10년을 제외하곤 출장 외엔 개인휴가를 간 적이 거의 없는데다 지난 10년간은 아예 치과 문을 닫은 적조차 없단다.

"게을러서 그래요.(웃음) 휴가를 가려면 계획도 짜고 부지런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나이들 수록 치과에 있는 게 가장 맘 편하기도 했고요."

이런 그의 남다른 성실함 덕분에 5년 전까지 하루 20여명의 환자들이 찾을 만큼 치과는 늘 북적였다. 그랬던 그가 작년부터 서서히 은퇴 준비를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제 진료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관둘 때가 됐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그리고 드디어 지난 3월 말 치과 문을 닫았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동안 일한 일터를 떠나는 기분은 겪어 보지 않은 이라면 짐작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만 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실감은 잘 안나요. 얼마 전 치과 간판 뗄 때 갔었는데 그땐 눈물이 나더군요. 나도 다 됐구나 하는…만감이 교차했죠."

은퇴 후 하고 싶은 일을 물어봤다. 많은 은퇴자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버킷리스트 목록이 빼곡할 듯싶었다. 그러나 웬걸.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단다.

"다만 28년간 살았던 고국 땅 곳곳을 좀 돌아다녀 봤으면 해요. 군의관 생활을 했던 문산을 비롯해 거주했던 서울, 부산 등도 가보고 싶습니다. 한국엔 10년 전 가보고 안 가봤으니 또 많이 변했겠죠? 그리곤 지금처럼 평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으면 그게 복 인거죠."

순간 뜬금없이 F.스콧 피츠제럴드의 역작 '위대한 개츠비'가 떠올랐다. 그 시대의 청춘이며 지금의 청춘이기도 한 소설 속 여주인공 데이지는 말했다. '화려하고 소중한 건 너무 빨리 사라져.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아'라고. 이 아름다운 청춘의 볼멘소리에 작가는 소설 말미에 답을 혹은 위로를 건넨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라고.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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