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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일방 통행의 주장

김정국 골롬바노 신부 / 성 크리스토퍼 성당

성령이 오시는 사건은 예수님 제자들인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게 하는가.

성령 강림의 장면은 외적인 거센 바람, 불꽃과 같이 강렬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부드럽고도 잔잔한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이 그 가운데 자리한다. 그것이 우리 삶에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체험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죄의 용서, 은총으로 얻는 믿음, 희망, 사랑이 가져오는 삶의 변화의 원인이 되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전에 없던 새로운 소통의 시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령 체험의 하나가 방언 체험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이상한 언어적 능력을 갖는 것, 한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혼란을 넘어서 놀라운 서로 간의 이해와 일치를 체험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라고 첫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사람들은 놀라워 했다. 구약의 바벨탑의 이야기와 정반대의 결과였다.

바벨탑 사건은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된 사건이라면 성령 강림은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된 일이다. 바벨탑 건립자들은 권력 의지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세상이 드러내고자 한 이들이다. 그에 비해 성령 강림의 제자들은 하느님이 하신 경이로운 일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하느님의 이름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려는 이들이다. 하느님이 자신들의 삶의 중심이 된 이들은 언어가 달라도 같은 성령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것은 사랑의 법인 것이다.



이에 비해 이기주의라는 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같은 말을 쓰면서도 자기 위주의 욕심과 주장으로 그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로 분열의 길로 나아간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여러 소통의 수단, 미디어 수단들도 서로를 묶어주고 연대하게 해주기보다 각자의 이기적인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되어 버린다. 호기심에 의한 가십거리와 소일 거리를 제공하는 수단이 되고 더 나아가 차차 자신과 타인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죄와 악습에 빠져들어가는 수령이 되고 만다.

오늘 한국 사회, 우리가 사는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언어가 악습, 격정, 불화, 불확실성을 유포시키는 부정적이 면이 강화되는 모습은 자주 목격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말을 하면 할수록 일방 통행의 주장이 되고 상대를 받아들이기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됨을 본다.

오늘날 참다운 것과 공동의 선을 찾고자 하기보다 내 입장과 주장을 강조하는 의도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신앙인에게 성령의 언어는 어떤 뜻을 지니는가. 성령의 언어는 다양함을 인정하여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며 모두가 우리를 초월해 있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특히 타인에게 뿐 아니라 자신 안에도 있는 불완전한 결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함께 뛰어넘는 길을 향해 서로 화해하고 치유하며 가라고 타이르고 있다.

bano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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