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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캘리포니아 패턴 인스티튜트 폴 김 원장…LA한인자바 역사와 함께하다

70년대 동대문서 재단사 첫발
괌 가족이민…혈혈단신 LA로
80년대 초 한인 재단사 귀해
패턴메이커 양성 학원 오픈
자바 호황 땐 학생 문전성시
최근 40·50대 수강생도 노크
"학생들 취업 가장 큰 보람
앞으로 봉사·선교 하고파"


한국에서부터 재단 일을 했고 패턴메이커 양성학원을 30년 넘게 운영 중이라 해 꽤 깐깐한 사감 선생님 스타일이 아닐까 상상하고 찾아 갔으나 웬걸, 그곳엔 한눈에도 평범하고 털털해 보이는 중년 신사가 있었다. 바로 캘리포니아 패턴 인스티튜트 폴 김(62) 원장이다. 먹고 살기위해 시작한 재단 일이 천직이 돼 어느새 40년 세월이 흘렀다. 80년대 초반 한인 재단사가 귀하던 시절 잘나가는 패턴메이커로 디자인사무실을 운영하다 학원을 오픈해 오늘에 이른 그는 초기 한인자바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모두 힘들고 어려웠지만 인정 넘쳤던 80년대 초반 LA한인타운 풍경은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소년, 패턴메이커가 되다

인천 출생인 그는 고교 졸업 후 친척이 운영하는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며 의류업과 인연을 맺었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버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려면 뭐라도 기술을 배우는 게 좋겠다 생각했는데 마침 이모님이 동대문에서 꽤 잘되는 의류 도매업체와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거기서 먹고 자며 패턴 기술을 배웠죠."

70년대 중반의 봉제공장들이 그러하듯 그가 일한 곳 역시 가정집을 개조해 재봉틀 10여대 들여놓고 40여명이 일하는 영세 업체였다. 직함은 공장장이었지만 원단 구매, 부자재 바느질, 잔심부름부터 월급관리까지 공장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다. 그러다보니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밤 10~11시가 다 돼서야 잠자리에 드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일이 적성에 맞았냐는 질문에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적성에 맞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가난한 그 시절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냥 열심히 일한 것뿐이었죠."

그렇게 공장 일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그 바닥에서 솜씨 좋기로 소문난 공장 내 일본인 재단사로부터 패턴을 배워 본격적으로 패턴메이커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후 3년 뒤 군 입대했고 제대 후 그는 남대문 시장에서 의류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남대문 의류 도매업체들은 서울 양품점들을 상대로 좀 비싼 제품들을 파는 곳이었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아 사업을 시작했지만 경험이 없다보니 1년도 채 못하고 문을 닫았어요." 이후 1981년 그와 가족들은 괌으로 이민 갔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당시 괌에 가족 전체가 이민 온 케이스는 우리 가족이 처음이었죠. 그런데 막상 가 보니 괌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연일 화씨 100도가 넘는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못살겠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이듬해 그는 혈혈단신 LA로 날아왔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코리아타운으로 가자고 해 내린 곳이 현재 로데오 쇼핑몰인 보이스마켓 앞이었다고. 그리고 한인 신문에 난 재봉사(미싱사) 구인공고를 보고 연락을 취해 다음날 바로 취직할 수 있었다. 버스타고 집과 공장을 오가는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그 시절 그래도 그는 행복했단다.

"당시엔 타운에서 한인들을 만나면 너나할 것 없이 서로 인사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통성명하고 나면 주말에 집에 초대해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고 김치며 고기까지 싸줄 만큼 인심이 후하던 때였죠. 그 시절 그렇게 만나 친구가 된 이들도 여럿이에요."

워낙 숙련되고 빠른 솜씨 덕분에 그는 얼마 안가 공장 내 최고 임금을 받는 재봉사가 됐다.

"당시 주급이 600달러쯤 됐는데 아파트 렌트비로 월 180달러 내고 나머지는 무조건 모았어요. 괌에 있는 가족을 데려 오려면 비행기 삯으로 7000달러쯤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2년 뒤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었죠."

당시 자바에 한인운영 봉제공장은 20여 곳도 안 될 만큼 좁은 바닥이어서 그의 솜씨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반년 만에 그는 패턴메이커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자바에 한인 패턴메이커는 2~3명 정도로 정말 귀했죠.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제게 재단 의뢰가 들어와 아예 독립해 디자인사무실을 차렸습니다."

1983년 사무실 오픈 후 일감은 물밀 듯 밀려들었다. 패턴은 물론 디자인 의뢰까지 있어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패턴을 배울 수 없겠냐는 문의가 잇따르자 1984년 그는 LA한인타운에 '폴스 디자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패턴 학원을 열었다. 타운 최초의 패턴메이커 양성 학원이었다. 낮에는 디자인사무실에서 일하고 학원은 야간반만 운영했다.

#자바 역사와 함께한 35년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자바는 전례 없는 호경기를 누렸다. 특히 남미에서 의류사업 경험이 풍부한 한인 1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한인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패턴메이커 수요가 급증했고 그의 학원도 클래스마다 40~50명이 수강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이런 자바 호경기를 타고 1990년 그는 한인 디자이너들과 패턴메이커들의 정보교환 및 친목도모를 위해 LA한인의상디자이너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자바 경기가 워낙 좋아 자바에서 양말만 팔아도 돈 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웃음)"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패턴 학원들이 늘어나면서 학원 사업은 고전을 겪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학원들 간 과당경쟁과 출혈경쟁이 본격화됐죠. 그러다보니 2000년대 들어서는 수강생 수가 예전만 못해진 게 사실입니다."

현재 그의 학원 수강생들의 연령층은 20~40대가 주를 이루고 요즘은 2세 수강생들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최근엔 50세 수강생도 있었는데 나이 들어 시작한 이들일수록 더 열심히 배우고 열정도 대단해요. 그러다보니 취업률도 나쁘지 않고요."

최근 자바 경기침체 탓 학원 비즈니스도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그가 빙긋 웃는다.

"경기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그리 큰 돈 벌었던 적은 없었어요. (웃음) 그래도 빈털터리로 미국 와 이만큼 먹고 살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그리고 학생들이 취업할 때마다 보람도 크고요. 앞으로 커뮤니티 봉사활동과 선교활동을 해보고 싶은 게 꿈이라면 꿈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겠는가. 엄청난 부를 일구지 않았어도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꿈을 실현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꽤 성공한 인생이리라.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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