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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한인들은 항상 '아리랑을 불렀다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64)
열정적인 쿠바 혁명가 김마사(하)

*한국인 커뮤니티는 강한 결속력이 있었나?

마사=우리는 많은 한국 어른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한국임을 느끼는지 설명하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과 다른 한국인 가족들의 삶은 엘볼로라는 농업 마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곳의 한국인 마을은 마탄사스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네나즈나 아바나로 이주했으나, 크리스마스 때나 삼일절이 되면 엘볼로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축하하고 기념했다.

(비비안 루이즈는 마사의 딸이고 토목 기사이다. 비비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비비안=나는 100% 쿠바 사람이다. 한국은 내가 자라온 환경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쿠바에 사는 한국인들에 관한 책을 쓰신 이래로 우리는 한국인들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에 대해 배우는 것이 매우 즐겁다.



*당신의 학력과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

마사=아버지는 웅대한 뜻을 품은 분이었다. 교육을 우선시했고, 특히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남의 집 하녀가 되거나 바나 카페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자라면서 학교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다. 단 90명만 뽑는 시험에서 1000여 명의 지원자들이 팽팽히 겨루었다. 지원자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전해에도 지원했던 경험자들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지원한 해에 바로 통과했고, 1956년에 졸업했다.

나는 시골 지역인 마탄사스에 있는 학교에서 일했다. 첫 학교에서 나는 서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쿠바 혁명 이후 중등교육과정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스패니시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도 공부했다. 마탄사스에 교육학 대학이 설립됐을 때, 나는 그곳에서는 마르크스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관심사는 철학으로 귀결됐고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었다.

*쿠바 혁명 때 어떠했나

마사=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혁명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었을 것이고 대학교수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었으나, 어깨너머로 책 읽는 법을 배우셨다. 쿠바가 알파벳 캠페인을 시작할 때, 이미 아홉 명의 자녀를 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쓰기까지 배우기 시작하셨다.

토마스=혁명 전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우리 주변에는 의사도 학교도 제대로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에 멋진 학교를 세웠고, 우리는 의사에게 진료도 받을 수 있다. 여전히 쿠바는 식량 부족으로 어려운데 우리는 교육이나 의료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

비비안=아마 완벽하진 않겠지만 기분은 좋다. 내가 원했던 것들을 거의 끝냈다. 나는 원하는 것을 공부했고, 공부하고 싶은 곳에서 공부를 했다. 혁명 이후 쿠바 교육 시스템은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아델리나 임 하이는 의사이고 프리미티보의 딸이다. 아델리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델리나=의료 제도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이고,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의논해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프리미티보=나는 혁명 이전과 이후 모두 좌절감을 느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나는 그때 군대에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혁명으로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 변화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29세였다.

혁명은 많은 좋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매일 성공을 위해 25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현재의 모든 것들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는 않는다.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95%의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을 통해 크게 얻은 것은 없다. 우리는 격렬히 투쟁했지만, 많은 것을 얻으려 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마치 속아 넘어간 기분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쿠바를 떠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사= 봉쇄정책으로 기인한 경제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쿠바를 떠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음식이나 옷 등 거의 모든 생필품에 있어 선택이 제한되어 있다. 어린 세대들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와 친척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쿠바 밖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좀 더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쿠바를 떠나기를 더 원한다.

*현 쿠바 정권에 있는 사람들은 발전에의 의욕이 없다고 들었다. 정말 그러한가

프리미티보=사람들은 대개 삶의 목표를 지니고 산다. 그러한 목표 없이는 생존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적 사고에서 보자면 일을 할 때 좀 더 높은 직위에 올라 가려는 욕구가 일반적이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욕조차 없다면 무엇을 위해 투쟁하겠는가?

마사=이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한국인 부모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은 쿠바 전문직의 사람들을 봐라. 우리 가족에도 두 명의 의사, 건축가, 그리고 세 명의 엔니지어가 있다. 모두 직업적으로 전문가들이 되었다.

스위스에 있을 때 빵집을 간 적이 있었는데, 다양한 상표의 빵과 차들이 있었다. 쿠바에서 그러한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다양함이 꼭 필요할까? 물론 완벽하지 않더라도 쿠바는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다.

비비안=나는 이곳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다거나 쿠바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이곳보다 좋은 곳들이 있고,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아우른 것들을 공유하며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마스=나는 세 명의 딸과 다섯 명의 손자들을 뒀기 때문에 굉장한 부자이다. 지난 달 29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날 모든 가족이 함께 모인 것이 정말 행복했 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애석하게 느꼈던 것들이 있다면

마사=개인적으로 나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사회문제로 인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볼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바람이 있다면

마사=내가 바라는 것은, 남편에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내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라울은 희귀한 뇌질환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한다. 내 인생의 목표는 죽는 날까지 남편을 잘 돌볼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울의 병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나

마사=아니 절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만 나의 도움과 사랑 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할 때 나는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강해진다.(라울은 2005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버지 대신 수상했던 일을 이야기해달라.

마사=1996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간 경험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도 같다. 내가 살아생전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랬기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무척 기뻤다. 아버지가 얼마나 오고 싶어하시던 곳인가! 아버지 때문만 아니라, 귀향을 꿈꿨지만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던 모든 쿠바 한인들이 떠올라 엄청 울었다.

그분들은 '아리랑'을 매일같이 불렀다. 우리 어머니 또한 요리할 때건 청소할 때건 항상 부르던 곡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부모님이 많이 생각났다.

*한국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토마스=우리는 남북한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다. 부모님이 이곳으로 건너올 당시에는 한국이 분단국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자체에 기뻐했고, 아무도 북한, 남한 출신으로 편 가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그냥 한국인이자 한국이었다. 통일된 한국을 볼 수 있다면 최고로 기쁠 것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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