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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웜비어 사건 때문에 북한 길 막히지 않았으면…"

[6·25 67주년 특별기획 II] 흥남 철수 피란민 이승일씨

교원 임용 받고 부임 준비하다 단신 월남
시권 취득한 후 북한 방문해 가족 재회
"다시 고향 가고 싶어…갈 수 있을 거야"


실향민 이승일씨는 못다 먹은 베이글을 버릴 때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눈시울이 젖는다. '이 빵을 내 식구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베이글을 좀처럼 손에서 내려 놓질 못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남한으로 내려온 이승일씨(85.사진).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온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은 여든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 한편에 자리잡고 있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이씨는 흥남화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몇 달 안 돼 피란길에 올랐다. 당시 이씨의 나이는 18세. 교원 임용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갑자기 전세가 악화됐다. 부모님과 형.누이동생들을 단천에 남겨두고 혈혈단신 흥남 부두로 향했다. 사흘 정도 지나면 다시 전세가 바뀌어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가족들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않고 떠났는데, 벌써 67년이 흘렀다.



당시 흥남 부두에는 수만여 명의 피란민이 배에 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을 기다린 이씨는 12월 7일 한 수송선에 가까스로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탑승 정원이 100여 명에 불과한 소형 수송선에 5~6000여 명의 피란민이 올랐다. 피란민들은 대부분 짐칸에 자리를 잡았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그 사이를 뚫고 짐칸 밖으로 나가는 건 그야말로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만큼 힘들었다.

배가 흥남 부두를 떠나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씨는 배가 며칠이나 항해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동해시 묵호항에 배가 도착했을 때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왔고 그래서 성탄절을 즈음해 남한 땅에 도착한 걸 알게 됐다.

이씨는 그렇게 떠나온 고향에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했다. 1978년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온 이씨는 1997년 미국 시민권자로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 고향인 단천엔 가지 못했지만 고려호텔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군복을 입고 나온 조카들도 처음 만났다. 인민군으로 소집되는 걸 피해 피란을 갔던 이씨에게 조카들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북한을 방문한 건 지난 2012년. 이씨는 "또다시 북한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최근 북한에 억류됐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숨진 오토 웜비어 사건으로 북한 여행길이 막힐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갈 수 있을 걸로 생각한다. 그러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수료한 뒤 뉴욕으로 이민 온 이씨는 무역회사를 차려 40여 년간 운영해 오다 최근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부인 이봉선씨와 함께 맨해튼에 살고 있다.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고 있다.


최수진 기자 choi.soojin1@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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