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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기생 소춘풍도 알았던 외교전략

#. 조선 성종 때 소춘풍이라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다. 하루는 성종이 문무백관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소춘풍을 불러 취흥을 돋우게 했다. 소춘풍은 먼저 영의정 앞에서 시조 한 수를 지어 불렀다. 재덕을 겸비한 문신들에 비해 무신들은 무식해서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는 내용이었다.

무신들이 발끈했다. 그러자 소춘평은 이번엔 병조판서 앞에 가서 또 한 수를 읊었다. 먼저 읊은 시는 농으로 한 것이며 헌헌장부 무신들이야 말로 진짜 사나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마지막으로 한 수를 더 지었다.

"제(齊)도 대국이요 초(楚) 또한 대국이라/ 소국 등나라가 간어제초(間於齊楚)하였으니 / 두어라 이 다 좋으니 사제사초(事齊事楚)하리라"

간어제초란 강대국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다는 뜻으로 강자들 틈바구니에서 약자가 괴로움을 겪고 있음을 표현한 사자성어다. 사제사초란 제나라와 초나라 모두를 섬긴다는 뜻으로 약소국이 생존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강대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소춘풍은 권세를 쥐고 흔드는 문신과 무신 양쪽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중국 고사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이다.



#. 소춘풍이 인용한 간어제초, 사제사초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맹자' 양혜왕 하편에 나온다. 배경은 중국 고대 춘추시대(BC 770~BC 403)다.

지금의 산동반도 인근에 등이라는, 사방 50리도 못되는 작은 제후국이 있었다. 북쪽엔 제, 남쪽엔 초나라 같은 강국이 있어 늘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어느 날 맹자가 등나라를 찾아오자 군주 문공이 물었다.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는(間於齊楚) 등나라는 하루도 힘들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를 섬겨야(事齊事楚) 합니까?"

맹자가 답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답을 하자면 연못을 깊이 파고 성을 높이 쌓아 백성과 더불어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천하의 맹자도 뾰족한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약육강식의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 생존의 기본 요건은 누가 뭐래도 강력한 국방력이라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이다.

#. 한국의 외교는 늘 복잡하고 미묘하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펴야 하는 간어제초의 신세이기 때문이다.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이르고, 한류다 뭐다 해서 문화력도 세계인을 사로잡을 정도로 국력이 커졌는데도 여전히 그렇다. 왜일까.

첫째는 자주국방이라는 기본 토대가 미흡해서다. 또 하나는 한국은 동북아 변방의 약소국이라는 우리 안의 뿌리깊은 고정관념이다. 그러다보니 큰 나라 앞에만 서면 조건반사적으로 기가 죽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사제사초 전략도 구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자주국방, 자주외교이라는 토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 바탕엔 자존심과 자신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게 없다면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들여놓아도 나무토막 하나 못 쓰러뜨리는 허깨비일 뿐이다. 아무리 머리를 굽신거려도 무시만 당할 뿐이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국익을 좌우할 많은 현안이 걸린 중요한 회담인 만큼 비례(非禮)는 없어야겠지만 과공(過恭) 또한 걷어내고 당당히 임했으면 좋겠다. 70~80%라는 압도적 국민 지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충분히 그래도 된다.

같은 책 '맹자'의 진심 구하편에는 '세대인즉묘지 물시기위위연(說大人則묘之 勿視其巍巍然)'이라는 구절도 있다. 나보다 권세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좀 깔보는 듯도 해야 하며 그 위세 당당함에 지레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런 정도는 충분히 알고 미국에 왔으리라 믿는다.


이종호 OC본부장 lee.jongh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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