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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가난하지만 부유한 그녀

엄영아/수필가

내게는 참 좋은 친구가 있다. 그녀를 알고 지낸지 강산이 3번 바뀌었다. 빠끔히 열려있는 아파트 문 사이로 봉두난발에 슬픔이 가득한 얼굴, 초점 잃은 눈빛의 서른을 갓 넘긴 듯한 여인. 아기를 안고 있던 그 처연한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쌍둥이를 낳았으나 6개월 전에 한 아기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묘지를 찾아 간다고 했다.

힘든 시련을 겪은 그녀를 안지 1년 남짓 되었을 때다. 몸이 아파 꼼짝을 못 하고 누워 있었을 때 고등어구이와 홍합 넣고 끓인 미역국을 가지고 왔다. 그 음식을 먹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후로 별미를 만들면 주고 싶고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서로 기다리고 반기며 소담하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 부부는 멕시칸 직원들과 함께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렌트비와 직원들 봉급을 줘야하는데 수금이 되지 않아 주말엔 스왑밋까지 뛰었다. 일에 지친 봄날, 가게를 빠져 나와 자카란다 나무 옆에 차를 세우고 음악을 들으며 울기도 했다. 경제적인 압박감으로 우울증에 시달려서 눈물을 머금고 10년 만에 가게 문을 닫았다.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말없이 한참을 붙잡고 등을 토닥거렸는데 큰 소리로 '내일부터 자유다'라며 훌훌 털고 일어서던 그녀다.

내가 암 수술을 받고 집에서 회복 중일 때였다. 한 달간을 매일 새벽 부부가 밴을 타고 15마일 거리를 오가며 양귀비꽃 다섯 송이를 병에 꽂아 대문 앞에 두고 갔다. 시련과 좌절을 겪은 사람이라 인생의 한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그녀는 언제 보아도 가식이 없다. 가게 문을 닫은 뒤로 밥에 물 말아 김치와 김만 먹으면서도 좋다고 전화한다. 라면을 먹는 날엔 닭 한 마리(계란) 넣었다고 자랑했다. 그 집 식단은 10년째 변함이 없다.

그녀는 실개천 같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졸졸 흐른다. 그 집엔 책이 사방 벽을 둘렀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시집을 좋아한다. 시를 읽으면 착해지는 것 같다고.

아파트 뒤뜰이 뭐 그리 넓을까마는 분재로 키운 석류나무·단풍나무·향나무·회양목 등이 빼곡하다. 그 친구의 영혼에 깃든 순전함과 부요함이 꿈꾸는 실개천처럼 언제까지나 소리 내어 흐르기를 기원한다.

그녀는 마음은 무명천처럼 곱다. 힘들게 살았어도 파란 하늘에 떠가는 하얀 구름같이 깨끗하다. 한 달 전 친구가 화초 석류를 집 앞에 두고 갔다. "지금은 꽃만 피었지만 석류가 열리면 오줌 쌀 거야"라는 쪽지를 넣어서.

내 마음에 구름이 가득해 비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면 다 안다는 듯 그녀의 전화나 카톡이 온다. 향긋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꽃잎 하나 따서 아침 식탁에 올려놓았다고 하면 같이 행복해하는 그녀. 친구는 나에게 소유의 한계가 무엇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무언(無言)으로 일깨워준다.

봄엔 자카란다 같고, 여름엔 물옥잠, 가을엔 은행잎, 겨울엔 홍시 같은 그녀,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라도 지척일 내 친구', 육안보다 심안이 밝은 그녀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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