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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반성문 : 바쁨은 유죄

송인한 / 연세대 교수·사회참여센터장

멀리 출장길에 분주히 일을 마치고 나면 문득 그곳에 사는 옛 친구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아 친구가 여기에 살고 있었지! 너무 급한 연락을 하는 것은 아닌가 주저하면서도 옛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합니다. 바뀌지 않은 번호에 신호음이 울립니다. 반가운 목소리의 친구는 당장 달려 나와 저녁을 대접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옛 시간을 함께 공유합니다.

대한민국 서울. 낯선 번호가 울립니다. 반가운 목소리의 친구는 서울에 왔다며 인사합니다. 반가움 가득하지만 일정을 확인하니 이미 잡혀 있는 일들로 꼼짝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못 갚는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 인사만 나눌 뿐입니다. 전화를 끊으며 미안함이 몰려듭니다. 언제든 여유롭게 환대해 주는 그들에게 나의 분주함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미안함은 죄책감으로 커집니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 도시 생활의 인사는 "바쁘지?" 대답은 "바쁘다"로 바뀌고 있습니다. 분주하게 달려가는 생활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넘어 우리를 속박합니다. 살기 위해 하는 일이 어느새 일하기 위해 사는 것으로 주객전도되어 버렸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와의 비교 자체도 일종의 강박이겠습니다만 근로시간은 멕시코와 더불어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연간 2285시간) 수면시간은 가장 짧습니다(7시간41분).



이 시대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추구하라고 강요합니다. 다양성의 의도와는 달리 다양한 모든 것에 획일적으로 달려가라고 등을 떠밉니다. 멀티태스킹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상.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도 모르는 전력질주가 칭송받는 세상. 일중독 워커홀릭(workaholic)이 세련된 키워드가 되어 버린 세상.

일중독은 절묘합니다. 알코올.도박 등의 다른 중독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데 비해 일중독은 성실함과 성공으로 포장될 수 있기에 우리 삶 속에 교묘히 침투해 있습니다.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목표를 추구하고 성공과 부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게 합니다. 스스로는 즐긴다고 하지만 일을 통해 자기학대를 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일중독에 빠져 있는 이들은 취미의 경험도 드뭅니다. 게다가 취미생활 역시 우리 사회에선 흔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이고 전투적이 되곤 합니다. 일단 등산을 한다면 히말라야 등반을 하는 듯 고가의 전문 등산복을 사서 동네 뒷산을 오르고 자전거를 시작한다면 마치 프랑스의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 참가할 법한 고가의 자전거와 각종 장비를 갖추고 동네 한 바퀴를 돕니다. 극단적 취미!

일.가정 양립이라는 단어 역시 또 다른 부담이 되어 양쪽 일을 더 많이 하는 극단 균형을 향해 갑니다. 쏟아져 나오는 21세기의 자기계발서는 마치 20세기의 위인전처럼 아니 그 이상의 종교 경전처럼 작동합니다.

피로사회! 한병철 교수가 던졌던 화두. 제목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공감했던 것도 당연합니다. 극에 달하게 추구한 발전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기에 어디로 더 나가야 할지 방향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문득 박노해의 시 '3단'이 떠오릅니다. "일을 할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사람을 볼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이런 3단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잠시라도 멈추면 뒤처지고 다시 기회가 없을 듯 불안을 넌지시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여유는 용기와도 같습니다.

한 선배 교수께서 던졌던 질문도 기억납니다. '바쁜가? 정말 교수 본분의 일로 바쁜가?' 삶에도 자문해 봅니다. 바쁜가? 정말 삶의 중요한 일로 바쁜가? 중요치 않은 일로 바쁠수록 중요한 일에는 그만큼 소홀해집니다.

소중한 일로 바쁘다면 모를까 바쁘다는 이유로 소중한 의미를 잊어버리고 돌아봐야 할 주위에 소홀하고 인색하다면 바쁨은 유죄임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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