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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레드라인 vs 그린라인

꼭 90년 전 이맘때 쯤. 벨기에의 한 고급 사교 클럽에 일단의 신사들이 자리했다. 이들은 석유 시장을 주름잡는 상인들. 문을 걸어 잠근 채 밀담을 나눴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딱 하나. 터키석유공사(TPC)의 발전적 해체다. TPC는 중동의 유전을 관장하는 회사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터키의 전신)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었다가 패망하자 서구의 열강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먹잇감이 된 것이다.

처음엔 영국과 프랑스가 반반씩 나눠 먹기로 했다가 들통이 났다. "우리도 승전국인데…." 미국이 제동을 걸어 할 수 없이 3등분 하기로 결론을 냈다. 모임을 주선한 이는 캘루스트 걸벤키언. 당시 석유업계에서 책사로 이름을 떨친 아르메니아계 영국인이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중동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어디까지냐를 두고 논란이 인 것. 그때까지만 해도 상세한 지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때 걸벤키언이 빨간 연필을 꺼내 들고는 경계선을 그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오스만 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나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라." 누가 그의 말에 토를 달겠는가.



이른바 '레드라인 협정'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사상 처음으로 석유카르텔이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쪽 대표가 노란색 연필로 그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 말이 맞다면 '옐로라인'이 됐을 것 같다.

어쨌거나 '레드라인'은 이들 3개국 이외는 얼씬 못하는 선이 되고 말았다. 이 선을 넘으면 죽음이라고 할까. 이후 레드라인은 '금지선'이란 뜻으로 쓰임새가 넓어졌다.

TPC 지분을 확보한 미국은 석유시장을 장악하게 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뒤엔 석유결제수단을 아예 달러로 못 박아 경제패권을 거머쥐게 된다. 레드라인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민족주의에 눈을 뜬 아랍권이 석유수출기구(OPEC)를 만들어 OPEC 세상이 온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요즘은 셰일 유전 개발로 다시 미국의 세상이 됐으니.

레드라인은 중동의 모래밭에만 그어진 것이 아니다. 예전 미국서도 엄연히 존재했다. 1970년대만 해도 특정지역을 붉은색으로 표시하면 그 커뮤니티는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은행 대출이 원천 봉쇄된 탓이다. 가난의 대물림이 당연시됐던 곳, 이를테면 LA의 흑인 밀집지역 사우스 센트럴이 그런 동네였다.

이 같은 관행이 기승을 부릴 때 금융기관은 지역을 네 가지 색깔로 나눴다. 빨간색은 이미 쇠퇴한 곳, 노란색은 몰락해 가는 동네, 파란색은 중산층 거주지, 초록색은 부촌을 뜻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세계가 온통 뒤숭숭하다. 알래스카를 비롯한 본토까지 사정권에 두고 있어 북이 이미 '레드라인'을 넘어섰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UN에 대북 석유 수출금지 안까지 상정할 태세다. 자칫 북한 전역에 붉은색이 칠해져 돈줄이 꽉 막히지나 않을지.

이렇듯 파멸이 뻔한데 왜 핵에만 올인 하고 있는 걸까. '최고 존엄'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서라지만 그사이 인민들은 배곯아 죽을 판이다. 대화의 장으로만 나와도 레드라인에서 해제돼 노란 줄이 그어질 게 틀림없다. 그뿐인가. 핵만 포기하면 북한은 블루라인, 그린라인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노동력이 싸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때문이다.

정상과 광기의 차이는 불과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한다. 생각을 한번 바꿔 먹으면 한반도에 '코리언 드림'이 열릴 텐데.


박용필 /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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