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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정호승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극과 극, 그 양 끝을 보라. 한 극 뒤는 바로 다른 편 극 아니던가. 절망을 먼저 하고 절망을 사랑하자. 절망과 끝없이 화해하고, 그리고 보이는 희망을 보자. 자세히 보자. 희망이 희망한다고 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누가 희망의 실체를 거절하겠는가. 희망은 절망의 밑바닥까지 다 내려간 후 그 단단한 절망 위에 세운 희망이 싹틀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절망이여 오라. 얼마든지 오라. 다 받아줄게. 그렇게 절망을 사랑하자. 쓰디쓴, 아픈, 그 절망을 다 받아준 사람이 아니고서는 희망을 품을 수도 말할 수도 없으리라. 그렇게 절망은 희망 앞서 유효한 것이다.

희망이란 말은 젊은 세대는 물론 나이 먹은 사람들도 그 단어 앞에서는 가슴이 설렌다. 누구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다. 유토피아와 샹그릴라에 대한 동경이 부정적인 현실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처럼 희망은 절망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절망적인 현재 안에서 ‘저기’ 미래의 시계 속에서 환히 빛나는 그 무엇이다. 드디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려는 자여, 가지려는 자여, 그 누구라도 ‘칼 붓세’의 ‘산 너머 저쪽’ 한 번쯤 다시 외워보며 가져볼 일이다. 그것이 희망을 이해하는 길 아닐까. 그것이 희망을 이해하는 길 아니던가.

임창현/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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