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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21g…죽음은 무겁지 않다

장열/사회부 차장·종교담당

'잘 죽고' 싶어하는 한인들이 한데 모였다.

지난 15일 소망소사이어티가 주최한 소망 포럼에 취재차 참석했다. 일명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죽음 세미나.

취지대로 잘 죽는 방법들이 소개됐다. 그럼에도, 죽음에 내포된 의미가 왠지 무거운 건 부정할 수 없다. 참석자들의 진중한 표정을 보니 더욱 그렇다.

잘 죽는다는 건 뭘까. 인간에게 죽음은 '실존'만큼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죽음은 고찰의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키고 싶을 만큼 두려운 개념일지도 모른다.



6년 전 실제로 유언장을 써봤다. 정말 죽으려 했던 건 아니고 기획취재부 당시 유언장 작성 체험 취재가 계기였다. <본지 2011년 8월6일자 a-1면>

오랜만에 그때 기사를 찾아 읽는데 문득 현재의 '나'와 괴리가 느껴졌다. 어쩌면 그동안 '잘 사는 것'에는 민감했어도 '잘 죽는 것'에는 둔감했던 탓일 테다.

삶은 죽음으로 귀결한다. 종교의 윤회와 부활 등의 관념 역시 모두 내세(來世)를 그려내고, 삶과 죽음은 하나의 붓으로 쓰이지 않나. 본래 이 둘은 동일선상에 놓여있으나 인간의 의식 속에는 '생과 사'를 함께 두기 싫어하는 습성이 있다. 육체를 포함한 모든 실존은 유한하고 죽음은 그 사실을 불가항력으로 명확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반드시 마주할 현실이기에 은연 중에 기피 또는 부정의 관념으로 자리 잡는다.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 죽음은 되레 소유에 익숙한 인간에겐 두려운 역설이다.

길을 가던 사람들에게 "왜 사세요?"라고 묻는 동영상(쿠쿠크루 제작)이 한때 화제였다. 4분짜리 짧은 영상에 담긴 메시지에는 생각할 지점이 많다. 짧고 단순한 물음인데 대부분 대답을 얼버무린다.

"어…" "그냥요…" "밥 먹으려고…?".

하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없다. 세속의 가치가 죽음을 제치고 '잘 사는 것'에만 의미의 방점을 찍으라고 재촉해서다.

인생을 그렇게 독촉하면 의미가 변질된다. 이제는 소유의 양이 삶의 질을 가르는 척도가 됐다. '잘 사는 것'의 재정의가 절실하다. 양손에 유한한 것을 쥐고 마치 영원한 것을 가진 양 살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세는 없지 않나.

분명 생과 사는 하나의 끈이다. 본래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과 상통한다.

그렇다고 어차피 죽을 테니 삶의 의미를 우롱하거나 존재 가치를 염세적으로 볼 순 없다. 인생의 자유를 빙자해 방종을 합리화시켜서도 안 된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한 게 삶과 죽음이기에 둘 다 귀중하게 다루는 게 옳다.

'생과 사' 사이에는 무게가 존재한다.

던컨 맥두갤 박사(1866~1920)가 의학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를 측정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초정밀 저울에 올려놓고 세상을 떠난 직후 곧바로 무게를 쟀더니 21g이 가벼워졌다는 거다. 5센트 동전(약 5g) 무게로 보면 네 개의 합에 불과하다.

평소 무겁게 느껴지는 죽음은 생각보다 가볍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잘 죽기 위해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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