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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여기에-세계한인문협-김홍섭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5/06/28 15:58

우리는 길을 간다.
일터로, 학교로, 또 만남을 위해 길을 간다.
길은 길로 이어져 있다.
막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되돌아서 다른 길을 또 갈수 있다.
평탄한 길이 있고 가파른 길이 있고, 광야와 사막의 길이 있는가 하면, 맑은 시내가 같이 달리는 길과 푸른 들판이 넓게 펼쳐진 초원의 길도 있다.
육지의 길이 있고 바닷길과 하늘의 길도 있다.
이런 공간적인 길과 더불어 우리의 어린 시절의 간난아이와 유아와 유년의 길과 소년과 청장년의 길과 노년의 길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길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길과 꿈과 상상의 길이 있다.
물론 상상 저 너머의 무변광대한 길도 있으리라. 그리고 모든 만상이 가야 하는 길이 있다.
별과 해와 달의 길이 있고, 그 긴 생성과 변화와 소멸의 길이 있다.
더 멀리 우주가운에 흘러 우리가 밤중에 만나게 되는 은하수(Milky Way)는 더 넓은 하나의 길이 아닌가. 또한 자연의 이법에 따라 생겨나고 성장하고 꽃피고, 꽃지고, 열매 맺고 그리고 땅에 내려 흙으로 돌아가는 생멸의 길이 있다.
물과 바람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길이 있고, 열과 연기는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올라가는 그들의 길도 있다.


캐나다에는 길이 동서남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
고속도로(Freeway)를 축으로, 동서로는 애비뉴(Avenue)가 남북으로는 스트리트(Street)가 있고, 지역과 길의 특성에 따라 로드(Road), 크레센트(Crescent), 바이패스(By-pass), 레인(Lane) 등이 있다.
한국의 ‘길(도)’ 또는 ‘대로’ 보다 체계적으로 정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는 지도와 주소만 정확하면 거의 길을 찾는데 실수하지 않게 된다.
물론 나침반이 있으면 더 확실하리라.
‘길’이라 하면 내게는 먼저 영화 두 편이 떠오른다.
이탈리아의 '길(La Strada)'과 미국영화 '마이웨이(My Way)' 이다.
길(La Strada)은 페데리코 펠리니가 감독한 1954년의 오랜 영화로 청순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젤소미나란 소녀와 우직하고 무심한 차력사 잠파노가 길 위에서 펼치는 방랑과 사랑의 이야기이다.
고독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서로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젤소미나가 사라진 후에야 그녀의 중요성을 깨닫고 슬퍼하는 잠파노의 연기가 오래 살아있다.
마이웨이도 오래된 영화이나 당대를 풍미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자기방식대로 끝까지 달리기를 완주한 사람의 이야기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나는 그것을 내 방식으로 해냈어!(I did it my way!)" 라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 귓가에 쟁쟁하던 기억이 있다.


길이란 이렇게 다면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면서도 혼동되는 의미를 주지 않으며, 우리에게 일관되게 어떤 방향과 지침을 말해준다.
그래서 많은 성현과 사상가들이 나름대로의 이론과 가르침을 설파하여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어 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난무하는 사상들과 제자백가들의 다양한 주장을 백가쟁명이라 했다.
중국과 인도의 사상들은 후에 한국에 와서 성리학과 교종, 선종의 꽃을 피워 탁월한 유교와 불교의 경지를 열었고, 사상의 정수들(精髓)로 고양시켰다.
서양 사상의 양대 흐름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주축으로 수많은 생각과 진리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명멸해 갔다.
세계사에서는 가장 뚜렷한 가르침을 제시한 4대 성인을 말하며, 그 가르침은 아직도 현현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랑과 인자와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하셨다.
공자님도 나름대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많은 가르침을 남겼으나 조문도 석사가 (朝聞道 夕死可)라며 참 도를 찾고자 했고, 석가모니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를 중심으로 해탈의 길을 제시했고, 소크라테스는 어리석음이 난무한 희랍의 민중을 향해 참 지혜를 설파하다 죽음을 당했다.
그 이후에 인류는 수많은 길을 제시하며 중세와 근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고 새 천년 21세기를 시작한지 다섯 해가 가고 있다.
고대와 중세 봉건시대의 인간성의 매몰과 절대 권력에 의한 개인의 비인간화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근세의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을 통한 민주주의와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삶의 개선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인간소외와 빈부격차와 불평등의 갈등을 도처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는 유신론과 무신론, 창조론과 진화론, 능력의 차이에 근거한 자유시장경제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정치경제, 그리고 종교 간의 갈등의 심화 등에 기초한 분쟁과 불협화음을 우리는 아직도 뚜렷하게 직면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이런 현상을 해석하려는 다양한 이론과 목청을 돋우는 사상의 정글, 생각의 범람에 침몰하는 이즘(ism)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길을 찾고 있다.
아니면 길이 있어도 자신의 길을 담대히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산정에 이르는 길은 많을 수 있다.
목표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길은 길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다.
길은 목표에 이르는 방향타이며 이정표이다.
목표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얘기한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 인류와 삼생의 중생을 자유롭게 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인간이 참 도리를 지키며 서로에 덕을 베푸는 사회, 그리고 괴변이 사라지고 참 지혜에 따라 인류가 살며 다스리는 이데아의 삶이 현실에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

고교시절에 우리는 프로스트(R. Frost)의 시 '가지 않는 길(The Road Not Taken)'을 읽고 전율한 적이 있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네....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네./ 먼저 길에 못지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이 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었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다 비슷했지만 이 길은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네....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이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노라고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았다고.”
그러나 우리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모든 길은 서로 이어져 닿아 있고, 또 그 길들은 마침내 한 산정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험한 길, 낭떠러지의 길을 가든, 평탄한 길을 가든, 사막의 길을 가든, 초원의 길을 가든, 바닷길을 가든, 하늘 길을 가든 인간의 길은 모두 닿아있고 궁극적인 인생의 삶의 목표와 귀향 점을 향해 이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길을 간다.
걸어서, 차로, 버스로, 전철로, 배로, 비행기로 우리의 길을 간다.
또 인생의 다양한 길을 우리는 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많은 분야와 다양한 사업에 우리는 삶의 터전을 두고 살며, 일한다.
자기분야에서, 자기의 길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사회가 더 밝아지고 이웃에 더 큰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길을 간다.
가정과 회사와 조직을 위해,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위해,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그리고 절대자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길을 간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부단히 질문하면서.....

김홍섭(수필가, 세계한인문학가협회, 트리니티 웨스턴대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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