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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박창규 전 한미은행 이사장…뇌섹남에서 딴따라까지 '팔방미인'

75년 타운 첫 한인약국 운영
82년 한미은행 창립 이사
4년전 판소리 경연서 수상
클라리넷·색소폰도 수준급
가주 첫 국악대회 여는 등
우리 소리 알리는데 앞장
난 애호가…600여주 수집
아코디언 배워 연주 봉사도


그의 이력을 듣고 있노라면 반전의 연속이다. 판소리 세계경연대회 우승에 클라리넷과 색소폰 연주실력까지 수준급인데다 최근엔 아코디언에까지 입문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30년 넘는 약사 경력이 도리어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거기다 소문난 난(蘭) 애호가라 하니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조선팔도에 이름 꽤나 떨쳤을 풍류가가 됐지 싶다.

올드타이머들에겐 LA한인타운 첫 한인약국을 운영한 약사로 친숙한 박창규(76) 전 한미은행 이사장이다. 은퇴 후 인생 2막을 청년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약사에서 은행 이사장으로



서울 출생인 그는 서울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약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971년 아내와 함께 LA로 이민 와 이듬해 USC 약대에 편입했다. 1974년 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이듬해 LA한인타운 첫 한인운영 약국인 '올림피아 약국'을 올림픽 길에 열었다. 최초의 한인 약국이다 보니 어떤 날은 문밖까지 줄을 설 만큼 한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1979년 3가와 세라노 인근에 2호점을, 2년 뒤엔 올림픽과 웨스턴 인근에 3호점을 오픈해 약국 3곳을 운영했다.

"한인 약사가 있다하니 멀리서도 찾아왔죠. 그럼 어디 약만 사가나요. 가족 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들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죠. 때론 영어서류 번역해 주고 이민상담도 해주는 등 약국이 사랑방 같았어요. 돌이켜보면 참 정도 많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죠."

그는 약사로서 뿐만 아니라 사업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미국 내 순수 한인 토착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한인은행인 한미은행 창립 이사로 은행 설립에 참여한 것이다.

"그땐 참 재밌게 일했어요. 원래 배우는 걸 좋아해서인지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를 배워간다는 게 즐겁더라고요.(웃음)"

당시 초대 행장을 지낸 정원훈씨를 비롯 한인 사업가 9명이 주축이 돼 설립된 한미은행은 이후 고속 성장을 거듭해 미주 대표 한인은행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그는 한미은행 성장이 정점에 이르렀던 2002년 이사장직을 맡아 한미은행 창립 20주년 행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설립 후 나스닥 상장을 비롯 2000년대 중반까지 성장일로를 달렸죠.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이 10~15배까지 오를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은행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죠."

그는 당시 은행 위기에 책임을 느끼고 2008년 이사직을 사퇴했고 2년쯤 뒤엔 약국을 모두 처분하고 은퇴했다.

#판소리에 빠지다

"원래 호기심이 많아서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죠. 학창시절부터 사람 좋아하고 음악 좋아해서 친구들이 날 DDR(딴따라)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웃음)"

그랬다. 은퇴 후 그가 보여준 행보를 보면 '딴따라'라는 소싯적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다이내믹하다. 7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판소리는 경지에 이른지 오래고 중·고교시절 밴드부에서 시작한 클라리넷과 색소폰 연주 실력도 전문가 못지않은데다 최근엔 아코디언까지 배우기 시작했단다. 뿐만 아니다. 대학시절엔 약대 합창단에서 지휘를 했다고 하니 전문 음악가가 되지 않은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이 수많은 음악 취미 중 그가 가장 애정을 갖고 매달린 것은 역시 판소리.

"판소리에 대한 관심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어요. 여덟 살쯤 됐으려나 그때 라디오에서 판소리가 흘러나오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게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희한하죠? (웃음) 그래서 언젠가 꼭 한번 배워 보고 싶다 생각했죠."

처음엔 1주일에 1~2번씩 서훈정 선생을 찾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판소리의 매력에 빠져 하루 5~6시간씩 판소리에 매달렸다.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2013년 그는 뉴욕에서 열린 세계국악경연대회에 출전해 시니어부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의 관심은 영역은 음악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남가주 한인사회 난 애호가들 사이에선 유명한 난 전문가이기도 하다. 오래 전 지인에게 난을 선물 받은 뒤 난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20여전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한 주 두주 모으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600여주에 이르러 집 마당에 300스퀘어피트 규모의 온실을 만들었을 정도다. 또 책을 보며 독학으로 '난 박사'가 된 그는 2001년 재미한인난협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침시간 대부분을 온실에서 보냈어요. 난 욕심이 컸죠. 그런데 이제 그 욕심도 내려놓으려고요. 이 나이쯤 되니 힘에 닿지 않는 걸 버리는 용기도 필요하더라고요. (웃음)"

#더불어 사는 즐거움

그가 은퇴 후 다양한 취미생활을 전문가 수준으로 하는 것도 놀랍지만 이 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취미생활이 단지 취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한인사회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라는 점이다. 판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2010년부터 '미주예술원 다루' 이사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고 2013년 가주 최초의 국악경연대회인 '미주한국국악경연대회' 대회장을 맡아 올해로 5회째를 맞는 등 한국 전통음악을 미주에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 왔다. 또 최근엔 양로원 및 각종 행사장을 찾아 아코디언 연주 봉사도 하고 있다.

"듣는 사람들이 행복해 하니까 뭔지 모를 뿌듯함과 기쁨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연주봉사는 꾸준히 하려고 합니다."

또 그는 2010년 고(故) 고원 시인의 뜻을 기리고자 '고원기념 사업회'를 설립해 고원 문학상을 제정하고 시비건립과 문학의 밤 개최 등 미주 문인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추진해 오고 있다. 덕분에 은퇴 후에도 그는 여전히 바쁘고 분주하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다'는데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지 싶다.

"그 많은 모임 중 뭐니 뭐니 해도 고교동창들 만날 때가 제일 좋죠. (웃음) 함께 모이면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유쾌하고 행복하니까요. 나이들 수록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게 최고의 건강 비결입니다."

은퇴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긴 휴가가 아닌 새로운 도전임을 그는 자신의 지난 시간을 통해 온전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가는 세월 붙잡아 보겠다고 억지 청춘 코스프레를 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아름답게 나이 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짧은 인생과 긴 예술 사이를 천천히 산책하며.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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