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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편하게 오는 '사랑방 병원'이죠"

가업 잇는다 '김광근 김소연 치과'

LA한인타운 유일 '부녀치과'
1세 단골들은 아버지 '손길'
젊은 고객은 '김 원장' 찾아
"환자가 만족하는 모습 최고"


LA한인타운 올림픽 불러바드에서 크렌쇼길을 따라 9가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 '김광근 김소연 치과'라는 간판이 보인다. LA한인타운에서 유일한 '부녀치과'다.

아버지 김광근 박사가 지난 87년부터 오픈한 곳이니, 올해로 같은 자리에서만 꼭 30년 째다. 1976년 캘리포니아주 치과의사 면허를 획득해 1977년 1월에 개업한 것을 감안하면 40년 미국 치과의사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의사에게 '내 집'과 같은 곳이니 환자들에게는 '사랑방'쯤 되지 않을까.

장녀인 김소연 원장이 지난 2010년 본격 합류하면서 '김광근 김소연 치과'는 3대가 찾는 치과로 자리를 잡았다. 오랜 단골인 1세대들은 아버지 김 박사의 손길이 푸근하고, 영어가 편한 젊은 세대는 김 원장의 깔끔한 솜씨에 반한다. 부녀치과가 사랑방인 것은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세상사는 이야기 꽃이 끊임없이 피어나기 때문이라는 게 김 원장의 소개다.



"특히, 할머니들이 그래요. 타주에 있는 자녀나 한국에서 친구들이 보내 온 편지를 들고 오세요.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러니 대신 좀 읽어 달라'고 하시죠. 편지를 읽다 보면, 웃기도 하시고 때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세요."

서울대 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보철학)를 받은 김 박사는 1975년 LA로 가족 이민을 왔다. 1965년 학부를 마치고 서울대부속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수료하고, 육군 군의관(대위)으로 전역 후 잠시 개업의로도 활동했으니, 한국에서도 10년 의사생활을 한 셈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새로 라이선스를 따야만 했다. "한국에서 다 마친 공부인데, 면허를 인정해 주지 않으니 별 수 없었죠. UCLA에서 익스텐션 과정을 수료하고 다시 USC의 2년 교육과정에 입학 하려고 했어요. 많은 사람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대학 선배가 단지 면허만 딸 것이라면 아까운 돈 내버리지 말고 그냥 시험 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혼자 준비해서 10개월 만에 쉽게 땄어요."

1941년 생으로 팔순이 가까운 김 박사가 은근히 '공부 실력'을 자랑한다. 당시 김 박사의 합격 소식은 본지에도 큼직하게 소개가 됐다.

김 박사는 1977년부터 벤나이스, 라푸엔테, 레이크우드 등에서 병원을 운영하다 1984년 LA한인타운에 정착했고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게 1987년이다. 아직, 임플란트 시술이 알려지지 않던 시절 김 박사는 틀니 고정장치를 이용한 독특한 시술로 유명했고 지금도 이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원장은 USC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후 USC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사실, 소아과 쪽으로 관심을 갖고 사람 심리에 대한 연구를 먼저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심리학과 의대 진학에 필요한 공부를 병행했어요. 그런데, 그만 아버지가 꾀는 바람에 치과전공으로 선회를 하게 됐죠." 김 원장은 학부 때 심리학을 공부한 게 어린이는 물론 어르신들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난 97년 치과 라이선스를 딴 김 원장은 아버지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가든그로브와 세리토스에서 치과를 운영했다. 그러다가, 2010년 모두 정리하고 LA로 합류했다. 연세 드신 아버지를 대신해 치과를 운영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부녀치과는 김 원장이 실질적 대표를 맡고 있다.

"막 치과의사가 됐을 때는 제가 아버지 덕을 톡톡히 봤어요. 의사면허를 땄다고 해서 바로 개업을 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저는 운 좋게 아버지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개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거죠."

김 원장은 새내기 치과의사 시절의 혜택을 이제 아버지에게 돌려드리고 있다. 김 원장이 대부분 환자를 치료하고 김 박사는 일주일에 세 번만 나와 단골손님을 치료한다. 김 박사가 이제는 딸의 보조의사가 된 셈이다.

"비즈니스만 생각하면 아마 함께 일 안 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그래도, 아버지를 찾는 단골이 아직은 있고, 또, 함께 사무실에 나와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김 박사는 딸이 병원을 좀 더 키우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김 원장 생각은 다르다.

"병원이 커지면 아무래도 환자와의 접촉이 사무적이 될 가능성이 커요. 의사는 환자 상태를 진단한 후에 임플란트가 좋은 지 틀니나 브리지는 어떤 지 등을 설명하고 선택하게 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야 해요. 큰 병원을 하게 되면, 지금처럼 부녀치과가 사랑방 구실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요. 그냥 지금처럼 부녀치과를 다녀 간 환자들이 만족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아버지의 진짜 뜻이라고 이해해요. 그 게 제 바람이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말은 다하는 사이죠"

부녀가 함께 일하는 방법

예약 시간에 많이 늦은 환자를 두고 아버지는 상대가 민망해 할까봐 연신 '괜찮다'고 다독인다. 하지만, 딸은 다른 환자 스케줄에 영향이 있다며 따끔하게 제지한다.

"아빠, 왜 그렇게 하세요."

"알았다. 잔소리 좀 그만해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가. 사랑스럽기만 하던 딸이 어느새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잔소리꾼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마냥 이어지는 딸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지 김 박사는 그저 빙긋이 웃고 만다.

아들이 둘이나 더 있지만, 아버지의 꿈을 이뤄준 딸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닌 탓이다.

둘째이자 장남인 폴은 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고, 막내아들 조셉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게 살짝 후회된다고 한단다.

요즘도 김 박사는 라이선스 유지에 필요한 공부를 위해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보드에서 요구하는 2년 50유닛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모든 준비는 딸이 알아서 척척 해둔다. "아들이었으면 절대 그럴 일 없었을 것이니,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라고 한다.

딸은 아빠가 고맙다고 했다. "새내기 의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가르치려 하시지 않았거든요. 아주 큰 일이 아니면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수 있도록 해줬지요. 개인치과를 남들보다 빨리 낼 수 있었던 이유였죠."

딸은 평생 공부하고 병원 일에만 매달린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매년 함께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유럽도 가고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녀요.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더 많은 추억을 쌓아야죠. 잔소리요? 어느 때고 그건 빼놓을 수 없지요. 우리 부녀는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그런 사이인 걸요."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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