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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 <65>그린란드 식민 시도

10세기 말경 '붉은 에리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노르웨이인 살인자가 아이슬란드로 추방되었다가 거기서도 말썽을 피운 바람에 다시 미지의 땅으로 추방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그린란드였다.

결국 범죄자인 에리크가 유럽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그린란드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추운 땅에 혼자 살게 된 에리크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아무도 자기랑 같이 살러 오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땅의 이름을 땅 없는 자가 쉽게 유혹될 만한 이름인 '그린란드'라 명명했다. 그리고는 몰래 아이슬란드로 돌아가서 땅이 없거나 척박한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환상의 낙원을 발견했다고 사기를 쳐서 아이슬란드의 삶을 정리한 450여 명을 태운 14척의 배가 그린란드를 목표로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의 그린란드는 지금 같이 춥지는 않아서 양과 소를 키울 목초지도 어느 정도 있었고 농사로 자급자족도 가능했다. 이주민들은 그린란드 남부에 도착하여 농사를 지을 만한 땅에 씨를 뿌리고 가축을 기르며 살 채비를 차렸으며 수확이 될 때까지 물개와 바다표범을 잡아 그 고기를 먹으며 연명했다. 그 땅에는 이미 에스키모인 이누이트 족이 살고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그들과 협조하거나 그들의 관습을 따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충돌만 일으켰다. 당시 그린란드 정착민에게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물고기와 바다코끼리의 상아 물개와 북극곰의 가죽 등이었다.

그린란드에는 14세기까지도 주교가 파송되었고 교회도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 소빙하기가 시작되면서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얼마되지 않는 식품 공급원을 놓고 에스키모들과 분쟁이 잇따랐다. 바이킹의 그린란드 식민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문의: (213) 381-0041, 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 : 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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