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김은자 / 시인
무엇보다 어르신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 드리고 싶어 나는 '가을'에 관한 시 일곱 편을 준비해 갔다. 식사를 마치고 30여 명의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젊어서는 각각의 삶을 살았을텐데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하나같이 닮아 있었다. 준비해 간 시를 한 편씩 읽어드렸다. 우리는 마른 나뭇잎, 별, 이유 없이 말라가는 여름 꽃, 그리고 뜬금없이 찾아온 가을에 대해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를 낭송해 갈수록 어르신들의 얼굴들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추석을 앞두고 장독대에서 발견한 단풍잎처럼 어르신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시를 낭송하면 어떤 어르신은 "어쩜 표현을 그렇게 했을까요?"하고 경탄했다.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낭송할 때는 어머니가 그립다고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김영랑의 '오메, 단풍들것네'를 낭송할 때는 만지면 바스락! 소리 낼 것 같은 영락없는 나뭇잎이었다.
나는 종종 '잘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한다. 행복한 노화, 긍정적인 노화란 어떤 것일까 고민한다. 노년이 되면 눈도 희미해지고, 귀도 어두워지고, 인지능력마저 떨어져 우울해지기 십상이라는데 놓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건강 다음으로 붙잡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정서(情緖)이리라. 사람은 울지 못하고 웃지 못할 때 병이 생긴다. 한국 문화는 점잖고 무르익은 노년의 모습을 묵시적으로 권하지만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그리워하며 늙어가고 싶다. 그리움에 족쇄를 채우지 말자.
바퀴가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을 참지 못하던 사춘기 시절이 있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을 책갈피에 꽂아 말리던 시절, 작은 일에 분노하고 애태우던 시절이 있다. 그들도 소리내 웃는 것이 조금씩 뜸해지더니 어느날 부터인가 슬퍼도 울지 못하게 됐을 때 문득 거울을 보니 쭈글쭈글한 낯선 얼굴 하나 서 있었을 것이다.
김기택 시인의 '귤' 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노인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여 있다.// 며칠 전에 딸이 사놓고 간 귤/ 며칠 동안 아무도 까먹지 않은 귤/ 먼지가 내려 있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귤/ 움직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작아지는 귤/ 작아지느라 몸 속에서 맹렬하게 움직이는 귤/ 작아진 만큼 쭈그러져 주름이 생기는 귤/ 썩어가는 주스를 주름진 가죽으로 끈질기게 막고 있는 귤// 어두운 방 안에 귤 놓여 있다.
나이듦이 사물이 되어가는 것이라니 슬프다. 우리는 그들의 정서를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아 둔 것은 아닐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먼지가 쌓이는 동안 귤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작아지느라 맹렬히 움직인다고 한다. 그 맹렬한 것들을 놓지 마시기를. 울고 웃는 일들을 부끄러워 마시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가을이 성큼 손 내미는데, 바람에 온 몸을 뒤척이며 마지막 빛을 발현하는 잎새처럼 부디 파르르, 가슴 떨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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