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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에 탄 거위 "100년 후 태울 수 없는 백조 나타날 것"

종교개혁 500년, 개혁의 현장을 가다 (1)

종교개혁 불씨 됐던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전 종교개혁가
표피 너머 시대 현실 직시해
성경 진리에 대한 믿음 고수
프라하 명물 천문시계탑 의미
유한한 인생 향해 종소리 울려


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당시 종교적 상황을 비판하는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그건 시대를 향해 목숨을 내건 고함이었다.

지난 8월22~9월1일까지 독일, 체코, 프랑스 등을 돌며 종교개혁자들의 발자취를 쫓았다.

진리의 왜곡은 무섭게 변질을 낳았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니 무지가 인간의 영혼을 잠식했다. 종교의 심각한 오도였다. 어둠은 그렇게 중세를 드리웠다. 시대는 빛을 필요로 했다. 아니 갈망했다. 어둠을 밝힐 횃불이 암묵적으로 요구됐다.



종교개혁은 대변혁이다. 교회가 본 모습을 찾으면 개인과 사회, 시대의 사조까지 뒤바꾸는 힘이 있다.

본지는 종교개혁 현장 방문기를 종교면에 시리즈로 연재한다.

체코 프라하=장열 기자


8월26일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얀 후스(Jan Hus·1372~1415·작은 사진) 동상이 광장 중심부에 우뚝 서있는 곳이다.

흔히 종교개혁 하면 독일의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기 마련.

그러나 그보다 100여 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마련한 인물이 당시 프라하 대학 신학부 교수이자 사제였던 얀 후스다.

안내를 맡은 김현배 목사(베를린비전교회)는 얀 후스 동상을 가리키며 "당시 성경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화형 당한 인물"이라며 "동상 밑에 새겨진 글씨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라'는 후스의 명언"이라고 소개했다.

죽기까지 후스가 외쳤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후스 동상의 시선은 오른쪽 두 개의 첨탑이 솟아있는 틴교회당을 향하고 있다. 그곳은 생전에 후스가 성경의 진리를 설교했던 장소다.

프라하는 온 도시가 유네스코에 등록돼 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밀집된 곳이다. 동상 주변으로 비투스 대성당의 자태와 카를 다리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의 야경은 황홀할 정도다.

분명 후스도 프라하의 전경을 두 눈에 담았으리라.

그러나 당시 그는 시대의 이면을 냉철하게 직시했다. 표피 너머 부패한 가톨릭 교회로 시선이 향해 있었다.

광장 왼편에는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1410년 제작) 탑이 있다. 그 앞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시계 밖으로 돌아가는 12개의 인형을 보기 위한 인파다.

몇분 후 종이 울리자 곳곳에서 관광객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종소리에는 본래 인생을 향한 경고가 담겨있다. 12개의 인형 중 해골 모양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모래시계는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울리는 셈이다.

하지만, 경종의 소리가 아무리 귓가를 때려도 욕망은 내면에서 넘실댄다. 인간에겐 죄성이 꿈틀대서다. 당시 종교는 그 굴레에서 타락으로 점철됐다.

후스도 그러한 현실과 늘 마주했다. 그가 프라하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던 해(1393년)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참회와 신의 은총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면죄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천국을 돈으로 구걸했다.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물질(돈)을 쌓아나갔다. 인간의 욕망은 신의 뜻으로 포장됐다. 후스가 활동할 당시 가톨릭 교회는 무려 교황이 셋이나 있었다.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부패로 어그러졌다.

신학자로 그리고 설교가로 활동했던 후스는 암흑 적 상황의 원인을 성경의 부재에서 찾았다. 당시 서민들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문맹이 팽배했다.

당시 가톨릭 미사는 라틴어로만 진행됐다. 성경도 라틴어로만 쓰여졌다. 서민들은 읽지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 앞에서 그저 자신의 영혼을 내맡겼다.

후스는 그 시대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 라틴어 대신 모국어(체코)로 설교했다. 성경도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했다. 언어를 통한 이해는 영적 무지를 깨우기 시작했다. 성경을 굳게 잠갔던 자물쇠가 풀리자 진리의 심층적 의미가 대중의 눈꺼풀을 벗겨냈다. 후스는 교회의 권위가 교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설파했다. 그건 가톨릭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소리였다.

당시 초월적 권력과 부를 누렸던 이들에게 후스는 분명 눈에 가시였으리라. 결국, 그는 콘스탄츠 종교재판에 소환돼 사형선고(1415년)를 받았다. 그것도 흔적마저 없어지는 '화형' 이었다.

그는 사형 선고 직전 제안을 받았다. 교황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고 입장을 번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제의다. 그러나 후스는 마다했다. 진리에 비추어 양심을 거스를 바엔 차라리 한 줌의 재가 되겠다는 작심이었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이다.

나무 기둥에 묶여 불에 타기 직전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한 마리의 거위를 불에 태우지만 100년이 흐른 뒤에 영원히 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신의 목소리를 대변한 예언이었을까. 그로부터 100년 뒤 실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무대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후스가 말했던 백조를 루터에게 투영했다.

후스의 동상 앞에서 나는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

종교 개혁은 하루아침에 시대를 뒤엎는 '혁명(revolution)'과는 달랐다. 본질(성경)로 회귀하려는 '개혁(reformed)'이었다.

그러나 회귀까지 무려 1000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만큼 종교 개혁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수많은 의지로부터 촉발됐다. 진리를 향해 암흑의 시대를 역행했던 걸음들이 축적된 결과다.

후스가 불에 탈 때 종교 개혁의 여명은 밝아오고 있었다. 그 빛을 후스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을까. 진리는 그렇게 사수돼왔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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