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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주가 보든 안 보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LA중앙일보] 발행 2017/10/16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7/10/15 11:05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도산 공화 (4)

1910년 즈음에 많은 한인들이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수확하는 일자리를 얻어 모여 살게 된 것이 미주에 생긴 첫 한인타운이다. 오렌지 수확에 나선 한인들의 모습.

1910년 즈음에 많은 한인들이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수확하는 일자리를 얻어 모여 살게 된 것이 미주에 생긴 첫 한인타운이다. 오렌지 수확에 나선 한인들의 모습.

도산, 파차파 주민들에게
정직과 근면의 중요성 강조

1910센서스에 100여명 거주
교회 주일학교만 50명 다녀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는 이스트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1년 6개월 동안 거주하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극심한 반아시안 정서와 노골적인 인종 차별 때문에 아시안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래서 한인들은 인종 차별이 심하지 않고 날씨가 온화하며 오렌지 농업의 발달로 당시 미국 최고의 부촌을 형성하고 있었던 리버사이드로 일자리를 찾아 1903년 또는 1904년부터 이주하기 시작했다. 즉 도산 안창호는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생활고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1900년대 초 리버사이드에는 이미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취업의 기회가 많아 한인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리버사이드 시내 근처에 위치한 페어몬트 (Fairmont) 공원은 1898년에 세워졌는데 1890년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공원'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는 것은 리버사이드가 당시 최고의 부촌 중의 하나였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또한 리버사이드에는 글렌우드 호텔(현재는 미션 인 호텔)이 있는데 10명의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고 숙박했던 명성있는 호텔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부시 대통령도 이 호텔을 방문하여 기금 모금을 했다.

1908년에 뉴욕의 산본 보험회사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파차파 캠프가 있던 지역에 '한인 거주지(Korean Settlement)'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미 1908년에 파차파 캠프는 한인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지도는 이 지역이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동네임을 확인시켜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도산 안창호가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하면서 한인 마을 (원래는 '동네')이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선주는 한인공립협회가 1905년에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 거주자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삼아 조직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908년 뉴욕의 산본 보험회사에서 제작한 지도에 표기된 파차파 캠프 한인거주지(Korean Settlement) 표시.

1908년 뉴욕의 산본 보험회사에서 제작한 지도에 표기된 파차파 캠프 한인거주지(Korean Settlement) 표시.

"파차파 캠프 거주자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삼아 조직된 한인공립협회의 핵심 일꾼들은 도산에게 '우리가 생활비를 부담하겠으니 안창호 당신이 하와이에서 건너오는 동포 이주민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시오. 그리고 당신은 이주민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도울 수 있도록 샌프란시스코에 올라가 활동해 주시오'라고 요청하였다"

즉 한인공립협회는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역할을 도산 안창호에게 맡긴 것이며 공립협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한 것이다.

공립협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한인들을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로 보내 그곳에서 오렌지 수확하는 일을 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공립협회는 한인 노동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가기까지 소용되는 기차 여비, 점심 등을 제공해주었고 그 때문에 한인들이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로 이주하여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립협회와 도산 안창호가 한인들의 '하와이-샌프란시스코-리버사이드'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고 도움을 많이 주었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한인 공동체를 구상하고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건설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총각 중심 사회였던 타 지역과는 달리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는 가족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이 형성된 것은 분명 안창호의 지도력과 공립협회의 조직적 도움, 활짝 열린 취업 문호와 온화한 날씨 때문인 듯하다. 가족 중심의 한인타운, 즉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어쩌면 1920년대 안창호가 세우려고 했던 이상촌의 실험을 파차파 캠프에서 먼저 시도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던져본다.

'신한민보'(1910년 10월 5일)는 리버사이드가 미국에서 최초로 형성된 한인 마을임을 확인해 주는 보도를 했다.

"리버사이드 지방. 이곳은 미국 올 때에 제일 먼저 창설한 한인의 동리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단체를 처음 시작하며 지방회가 제1차로 설립된 곳이더니 그동안에 고난도 많이 당하고 주재하는 이도 자주 바뀌어 지탱하여 보존할 기약이 없더니, 지금은 김인수(1864-1949) 씨의 가족이 다시 이곳으로 와서 그 자제 용련씨가 주무하여 동포를 인도할 터인데, 가옥을 사고자 연방 논의 중이며, 회관 가세 부족은 김인수씨가 대신 지급하여 아무쪼록 한인의 근거지를 유지하기로 결심이오니 사회와 개인에 모두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사오며, 신문사를 위하여 불과 7~8명 동포의 의연금이 20원이온데, 김용련씨가 담임하여 수송할 터이옵고"라고 보도했다.

차의석도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리버사이드가 미국 최초의 한인 거주지라고 밝히고 있다.

"온화한 날씨, 취업, 생활 조건에 모두 만족해했다. 이곳이 수 년 동안 미국 최초로 한인들이 거주한 지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후 근처의 레드랜즈, 업랜드, 클레어몬트 지역에도 한인 거주지가 형성되었지만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한 곳은 리버사이드였다."

이처럼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가 미국에서 형성된 최초의 한인타운 또는 마을이라는 사실은 '신한민보' 보도와 여러 객관적 자료들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던 한인 인구는 정확하지 않으나 191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서 약 100여 명이 거주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수는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현지 신문인 '리버사이드 데일리 프레스'는 당시 약 50여 명의 한인 청소년들이 교회와 주일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봉윤도 리버사이드에 한인타운이 형성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리버사이드에 도착한 한인 노동자들은 안창호로부터 지침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백인 농장주들은 한인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리버사이드에 오렌지 수확을 하러 온 한인들에게 거주지를 형성하라고 했다. 안창호는 한인 노동자들이 10명이 한 팀으로 운영되도록 조직을 정비하고 다음과 같이 지도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정직 밖에 없다. 농장주가 보고 있든 아니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오늘 일하고 내일도 일할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농장주들이 우리를 신임하면 우리의 친구인 김씨, 이씨 또는 박씨도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리버사이드 한인들은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 개인이 열심히 일하면 다른 한인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도산 안창호의 지침을 따라 열심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오렌지 수확하는 일을 했다. 분명한 것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는 당시 미국 최초, 그리고 최대의 한인타운이었고 한인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다만 한인 계절노동자들은 계절에 따라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일하다가 다시 오렌지 농장과 허드렛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부촌인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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